
총리 재임기의 쁘리디 파놈용. 위키미디어 코먼스

1935년 탐마삿대학에서 강의하는 쁘리디 파놈용. 위키미디어 코먼스
입헌민주주의 꿈꾸던 청년, 1917~1932년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쁘리디는 고등학교 과정을 14살에 모두 마친 수재였다.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아 2년 정도 아버지를 도와 농사짓다가 17살이 되던 해 방콕에 있는 사법부가 운영하는 로스쿨에 입학한다. 1919년 변호사 시험에 최종 합격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려 만 20살이 되어서야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1920년 사법부 장학생으로 발탁돼 프랑스로 법학 공부를 하러 떠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보인다. 1924년 캉대학에서 법학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파리정치대학에 진학해 법과 정치경제를 전공하고, 1926년 법학박사 학위와 정치경제대학원 졸업증을 받는다.파리에서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부 시절에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서 유학하던 학생들과 시암(1939년 이전 타이의 국명) 지식인 협회를 세워 조국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이런 모임에서 절대군주제의 비합리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입헌군주제에 대한 희망이 공유됐다. 훗날 인민당 창립 총회라고 할 만한 첫 번째 모임이 쁘리디와 미래의 정치적 라이벌이 될 피분 송크람을 포함한 7명의 유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1926년 2월 파리에서 열린다. 이 모임에서 이후 1932년 인민당이 절대왕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리며 발표한 독립, 평화와 질서, 경제, 평등, 자유 그리고 교육 보장이라는 6개 원칙이 만들어진다.
타이 방콕 탐마삿대학에 있는 쁘리디 파놈용의 동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혁명 열기를 개혁 동력으로, 1932~1947년
인민당 혁명이 성공한 뒤 쁘리디는 새 내각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됐고, 곧 인민당 하원의원 대표로 선출돼 제헌위원회에 들어갔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는 임시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시암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기본 원칙과 삼권분립 원칙을 세운 1932년 임시헌법이 그해 12월10일 라마 7세 쁘라차티뽁 왕에 의해 공표된 것은 타이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헌법 공표 뒤 하원에서 선출된 15명의 인민위원회 위원이 된 쁘리디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민당이 약속한 국가 경제계획 수립이었다. 절대왕정제가 폐지된 만큼, 봉건적인 지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암 경제 구조의 전근대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쁘리디가 제시한 경제개혁안 안에는 토지 국유화, 국립은행 설치, 공공고용 확대,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이 포함됐다. 다수의 인민당 의원이 찬성했지만 몇몇 지도자가 반발하며 쁘리디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결국 1933년 12월 쁘리디의 사상 검증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쁘리디는 소환된다. 심문을 맡은 법학자가 쁘리디에게 1933년에 쓴 국가 경제계획 개요안 내용을 물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서 구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서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부르주아지와 영원히 싸울 것인가?” 쁘리디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어떤 형태의 독재도 싫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뿐 아니라 어떤 계급의 독재도 싫다.” 위원회는 쁘리디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발표한다. 1934년부터 쁘리디는 다양한 정부 관료직을 거치며 인민당이 초기에 세운 6개 원칙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1934년 3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 지방 관료도 선출제로 바꾼다. 1933년 만든 새로운 지방행정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 공공사업부를 설치하고 병원을 짓고, 농부들을 위한 보를 만드는 사업 등을 시행한다. 1936년에는 외교부 장관으로 활약했다. 약 2년간의 재임 동안 쁘리디가 가장 집중한 과제이자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짜끄리 왕조가 유럽·미국·일본 등과 맺은 불평등조약 취소였다. 쁘리디는 협상과 설득을 통해 12개국이 시암에서 누리던 치외법권과 무역 특혜를 철회시켰다. 1938~1941년 재무부 장관으로서 왕실에 내던 직접세를 다수 폐지하고 상위 소득계층에 부가세를 부여해 이전 왕들이 탕진한 국고를 채웠다. 쁘리디가 재무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그가 처음 국가 경제계획 개요안에서 제안한 내용이 여럿 실현됐다. 사립은행을 허락하되 1940년에 국립은행을 만들어냈다. 서민과 농민을 괴롭히던 과다한 세금을 없앴지만, 한편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 대처하며 환율 차이를 이용한 투자나 환금작물의 독점, 부가가치세 부과 등으로 내실을 챙겼다. 7년여의 화려한 정치 경력은 1941년부터 본격화한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시대의 역풍을 맞는다.짜끄리 왕조의 섭정에서 망명자로, 1941~1949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1940년 베트남에 진출한 일본은 피분 송크람에게 접근해 일본이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등지로 확장해나갈 거점 지역으로 타이 영토를 쓸 수 있게 해준다면 과거 서구 제국에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찾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피분은 1942년 1월25일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전체에 전쟁을 선포한다. 쁘리디는 자유타이(세리타이)라는 지하조직을 주도해 파시스트적 피분 정권에 대한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4년 7월 피분은 사임한다.일본이 타이 영토 사용권을 얻기 위해 피분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인물이 바로 쁘리디였다. 이에 1941년 말 피분은 쁘리디에게 1935년 퇴위한 쁘라차티뽁 왕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아난다 마히돈 왕의 섭정을 맡긴다. 1946년 6월 아난다 왕이 침실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됐을 때 쁘리디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아난다 왕의 죽음은 ‘사고’였지만, 군부는 1947년 왕의 죽음을 핑계로 쿠데타를 단행한다. 곧 피분이 다시 총리직을 거머쥐면서 쁘리디는 위협을 느껴 타이를 잠시 떠난다. 1949년 2월26일 자유타이 세력과 공조해 군부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그의 민주화 혁명은 쓰디쓴 실패를 맛본다.망명자의 삶 그리고 뒤늦게 찾은 영광, 1950년~현재
쁘리디가 개인적, 사상적 그리고 현실적 이유로 선택한 망명지 중국은 오히려 그가 애초 호찌민과 다름없는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줬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쁘리디는 타이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고, 1970년에는 자신에게 철학·사상적 고향이던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1983년, 쁘리디는 제2의 고향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1965년 마오쩌둥을 만난 쁘리디 파놈용. 위키미디어 코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