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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얀마 쿠데타 1년] 포용을 통한 변화에서 처벌을 통한 변화로

독재자 클럽 이미지로 회귀할 것인가 변화를 단호하게 밀고 나갈 것인가, 기로에 선 아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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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2-02-06 15:33 수정 : 2022-02-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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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7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순회의장국인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오른쪽)가 미얀마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해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군 최고사령관을 만나고 있다. 캄보디아 국영TV 제공, 연합뉴스

2022년 2월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꼭 1년을 맞았다. 지난 1년은 미얀마 민중이 쿠데타군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피 흘린 투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군부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1500여 명, 체포된 사람은 1만2천여 명(누적)에 이른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미얀마 국민의 열망은 꺾일 줄 모른다.

2022년은 미얀마에서 군부가 첫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미얀마 국민은 1962년 군부정권이 들어선 뒤 2015년 총선에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압승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기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군정 치하에서 눈 가리고 입 막힌 채 수탈당했다. 그들에게 5년의 민주화 시절은 짧지만 너무나 강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무장투쟁에 나선 원동력이자, 군부가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없는 이유다.

국제사회도 미얀마 국민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 특히 미얀마에 대한 한국 시민의 지지와 연대는 현지 시민들도 감사와 우정을 표현할 만큼 각별하다. 역사적 경험이 비슷한 까닭에 공감이 크다. 우리도 오랜 일제 강점과 군사독재, 1980년 5월 신군부의 광주 학살, 끈질긴 민주화운동으로 7년 만에 민주주의제도를 되찾았다.

<한겨레21>은 미얀마 민주화운동 1년을 맞아 미얀마 독립언론 기자들이 직접 취재해 보내온 르포로 민주화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반응과 미얀마 군부의 움직임에도 주목했다. 미얀마 국민이 거리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목 놓아 외치는 구호가 하루빨리 현실이 되길 바란다.

“아예더봉 아웅야미!”(혁명은 승리한다!)

미얀마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아세안 연계성’(ASEAN Connectivity)은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미얀마 군부 탓마도의 수장이자 2021년 2월 쿠데타를 이끈 민 아웅 흘라잉 군 총사령관의 무모한 결단으로 최대 위기에 놓였다.

199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연합기구인 아세안은 서방의 반대에도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 결정은 서방의 제재가 어떤 효과도 보이지 않는 ‘가치외교’와의 차별화를 기하면서 포용을 통한 변화를 기대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용외교를 통해 최빈국인 미얀마와 아세안 국가들이 상생번영의 연계성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미얀마를 향한 아세안 방식의 효과는 2010년 개혁·개방 시대가 열리면서 확인됐다. 미얀마는 미래의 가치가 무한한 신흥시장으로 주목됐다. 미얀마는 반세기가 넘는 고립주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정지된 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때를 계기로 전근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런 미얀마의 변화는 아세안의 성과로 평가되기에 충분했다.

1995년 ‘전장에서 시장으로’ 기치의 현실화
아세안은 냉전 시기인 1967년에 동남아시아에서 반공 독재국가를 대표하는 타이와 인도네시아의 주도로 창설됐다. 그렇지만 1971년 아세안은 강대국들의 어떠한 형태의 개입에서도 자유로운 중립지대임을 공표했다. 1980년대 후반 베트남이 개혁·개방을 취하자, 아세안은 1995년 적대관계이던 사회주의국가 베트남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전장에서 시장으로”라는 기치를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이어 1997년 창설 30년이 되던 해에는 서방이 ‘불량국가’로 지목하던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아세안 창설을 이끈 주요 국가들은 전환기에 있었다. 필리핀과 타이는 신생 민주주의 체제로 나름 자리잡아갔고, 인도네시아에서도 30년 넘게 장기 집권하던 수하르토 체제의 위기가 임박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마하티르 빈 모하맛 1인 절대권력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국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신흥공업국가군으로서 ‘경제가 민주주의’라는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미얀마는 아세안의 일원이 됨으로써 고립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아세안 주요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학습하는 기회를 얻었다. 마침내 아세안의 포용외교의 성과로 미얀마에도 봄이 찾아왔다. 군부에 의해 최빈곤 국가로 전락한 미얀마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치범이 석방되고 언론자유와 노조활동이 보장됐다. 국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당 활동의 자유가 가능해지면서, 1988년 아웅산 수치가 창설하고 이끌어온 민주주의민족동맹(NLD)도 2012년 4월 보궐선거에 참여했다. 예상대로 NLD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국제적으로 민주주의의 아이콘으로 불린 수치도 이때 국회에 입성했다.

2011년 3월 군 장성 출신의 테인 세인을 수반으로 출범한 유사 민간정부는 미얀마평화센터(MPC)를 설치하고 경제 회생의 절대조건인 평화 구축을 위해 소수민족들을 참여시키는 범국가정전협정(NCA)을 가동했다. 시민사회와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10개가 훨씬 넘는 소수민족무장단체(EAOs)가 협상에 참여했는데 그중 8개 단체가 협정에 서명했다. 60년 넘게 지속된 분쟁이 종식되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2016년 수치의 NLD 정부가 출범하자 평화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2021년 10월26일 팜민찐 베트남 총리(가운데)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화상으로 열린 제39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아세안은 이 회의에 미얀마 군사정부 대표를 초대하지 않았다. AP 연합뉴스

군사정부와 뭐가 다르냐는 여론 일으킨 NLD 정부
그러나 NLD 정부는 이전 정부의 평화협상팀이던 미얀마평화센터를 해체하고 이보다 규모를 축소한 국가화해평화센터(NRPC)를 발족했다. 평화협상 과정에 시민사회의 참여도 축소됐다. 평화협상팀 최고 책임자에는 이 분야 전문가라고 보기 힘든 아웅산 수치의 주치의 출신 틴 묘 윈이 임명됐다. 시민사회와 소수민족들은 실망했다. 특히 ‘제노사이드’(인종 학살)로까지 불린 ‘로힝야 학살’ 문제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을 때도 수치는 이들을 지칭할 때 ‘로힝야’라는 정식 명칭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로힝야 인권 문제를 취재하던 언론인들이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도 NLD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마침내 수치가 로힝야 집단학살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불려나가기까지 했다. NLD 정부와 과거 군사정부의 통치 방식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비판적 여론이 국내외에 조성됐다.

이처럼 실망스러운 양상은 국민에게 ‘엄마’로 추앙받는 아웅산 수치의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카리스마 정치는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인 공론장과 숙의에 대한 관대함이 약하고 때로 정치를 사유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포용정치와 카리스마 정치는 양립하기 어렵다. 민족 간 균등한 권력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연방민주주의는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동원정치가 아니라 숙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포용정치에서만 가능하다.

아웅산 수치는 연방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주목받았던 ‘팡롱협약’을 추진한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만큼 소수민족들과의 평화 공존이 미얀마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인지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수치는 로힝야 인권 문제로 서방을 포함한 국제사회와 거리가 멀어지자 중국 의존도를 높여갔다. 이런 외교 행보는 서방 대신 중국을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지만, 탓마도로부터 중국을 이격시키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친서방적이었던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이런 변화는 비판적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아닌 수치 1인의 절대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통치 경향과 맞물려 일어났다. 그럼에도 2020년 11월 총선에서 미얀마 국민은 수치의 NLD에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오랜 기간 고통을 준 탓마도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컸다.

심카드처럼 돋보였던 SIM의 존재
다민족국가인 미얀마에서 소수민족무장단체와의 실질적 평화를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안착은 가능하지 않음을 독립 이후 우누 집권 시기는 이미 보여줬다. 그러나 NLD 정부는 소수민족과의 신뢰 쌓기에 게을렀고, 그 대신 외세인 중국의 힘을 빌려 탓마도를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위험한 거래는 실패했다. 중국이 내정불간섭 명분을 들어 2021년 2·1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회원국들은 쿠데타 주역 민 아웅 흘라잉의 참석을 배제했다. 앞서 4월24일 ‘즉각적인 폭력 중단’ 등 흘라잉이 아세안 정상들과 합의한 5개항의 이행 없이는 국가의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아세안의 강력한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2·1 쿠데타 이후 ‘미얀마 위기’ 해결에 적극 나선 싱가포르(S), 인도네시아(I), 말레이시아(M)의 역할이 있었다. 쿠데타 직후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대된 시민불복종운동에 정보통신 수단인 심(sim)카드의 기여가 컸듯이 이들 3개국(SIM)의 움직임 역시 돋보였다. 중국도 이들 3개국이 중심이 되는 아세안의 행보를 무시할 수 없는 듯,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로 흘라잉을 불러내 아세안의 ‘내정간섭’에 기대를 표명했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출범시킨 민족통합정부(NUG)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미얀마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흘라잉이 이끄는 탓마도는 총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억지 주장이다. 2021년 7월 흘라잉이 군 총사령관직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에서 벌인 일종의 ‘거부 쿠데타’(Veto Coup)의 명분이었을 뿐이다. SIM 3개국과는 달리 타이, 베트남, 라오스 등 아세안의 다른 회원국들은 ‘내정불간섭’을 이유로 군부 쿠데타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행히 모호한 태도를 취하던 필리핀이 아웅산 수치의 참여 없는 미얀마 평화 프로세스는 현실성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세안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이제 미얀마 민주 진영을 대표하는 당사자는 민족통합정부이지 아웅산 수치가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저항전쟁을 선포한 민족통합정부는 국내외로부터 종이호랑이가 아닌 미얀마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아웅산 수치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던 NLD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소수민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1947년의 ‘팡롱 정신’을 부활시켜 명실상부한 연방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한다. 청년이 주역인 시민불복종운동의 저항정신에 부응할 수 있는, 세대교체를 포함한 대변화가 민족통합정부 내에 있어야 한다. 군사정부 아래 11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출감 뒤 여성인권 신장과 시민 정치 교육에 힘쓴 진 마 아웅 외교부 장관, 2·1 쿠데타 직후 양곤에서 처음으로 시위를 조직했던 28살 최연소 각료이자 NLD 정부 시절 벌어진 로힝야 학살을 규탄하는 연대활동을 벌인 에이 틴자 마웅 여성청년아동부 차관처럼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념에서 자유로운 젊은 정치인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군부 탓마도, 포용의 손길 내민 아세안 배신
미얀마의 역사를 과거로 회귀시키는 쿠데타의 주역 민 아웅 흘라잉의 탓마도는 미얀마 청년들이 주도한 시민불복종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반세기 넘게 축적해온 아세안의 지역 연계망을 일거에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는 미얀마 군부 탓마도에 포용의 손길을 내밀어 변화의 기회를 준 아세안에 대한 배신 행위다.

바야흐로 아세안은 ‘미얀마 위기’를 두고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과거 냉전 시기 독재자 클럽 같은 이미지를 다시 얻느냐, 아니면 탓마도를 향해 포용을 통한 변화 대신 처벌을 통한 변화를 단호하게 밀고 나갈 것이냐의 기로에 섰다. 아세안이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을 내보이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투쟁하는 미얀마 청년들의 찬사를 받을지, 비난의 대상이 될지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다.

박은홍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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