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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 절대우위는 변함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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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21 00:00 수정 : 2008-12-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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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군사동맹까지 염두에 둔 철저한 미국 중심 사고로 동북아시아 지형을 해석하는 빅터 차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아니다! 그건 아니야!’

빅터 차는 연방 부정했다. 뭐가 아니란 말인가? 워싱턴 엘리트들 사이에서, 그리고 미국 전역의 언론에 등장하는 주장에서 유행처럼 번져가는 얘기들. 그건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퇴조하고 있다는 것, 2차 대전 뒤 미국이 장악해온 이 지역 지배권을 중국이 대신 차지해가고 있다는 것, 미국은 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제대로 대처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국계 미국인 빅터 차는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은 오히려 지배력을 더 강화하고 있다, 당신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부시 정권은 연속 집권 기간에 중국과 일본을 잘 통제해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해왔다, 어느 지역보다 아시아에서 미국은 잘해왔다, 그렇게 외치고 있다. 억울하다는 듯 거의 항변조다.


수출입 등에서 중국이 미국을 대체해가는데…

‘미국의 힘, 믿습니까?’ 한국계 미국인 빅터 차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국장(가운데)은 냉전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미국 주도하의 ‘2차 대전 이후 체제’를 21세기에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외교·안보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2007년 11·12월호에 ‘Winning Asia- Washington’s Untold Success Story’(‘아시아를 우리 품에- 알려지지 않은 부시 정권의 아시아정책 성공 스토리’쯤 될까)라는 제목을 달고 실린 글이다. 지금 조지타운대학 정치학과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아시아연구기금 책임자인 빅터 차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국장이라는, 한국계로서는 미국 정부 안보담당 최고위직에 있었다. 부시 정권의 동아시아정책 담당 고관 출신인 그의 주장엔 나름의 근거가 있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그의 관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을지 모른다. 자신이 주도한 정책이 잘못됐다고 하면 자기 부정이 될 테니까.

그런데 그 글 바로 앞에 ‘Washington’s Eastern Sunset- The Decline of U.S. Power in Northeast Asia’(통틀어 ‘동북아시아에서 지는 해 미국’쯤 되겠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필자는 제이슨 셰플런과 제임스 레이니. 셰플런은 1995~99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정책 자문관으로 일했고, 한국의 민주화와도 인연이 있는 레이니는 1993~97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에머리대학 명예총장이다.

셰플런과 레이니는 먼저 동아시아에서 2차 대전 이후 누려온 미국 힘의 절대적 우위가 끝났다는 사실을 각국 수출입과 국내총생산(GDP) 비중 변화 등 각종 통계 수치들을 토대로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군사력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자리는 급속히 중국이 대체해가고 있고 이에 따라 일본과 한국의 정세는 급속히 유동화하고 있다. 미국의 ‘안보우산’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절대적 우위를 누린 세계 2위의 경제력에 안보를 의지해온 일본의 우경화와 재무장, 민족주의의 대두는 바로 그 두 가지 조건, 즉 미국의 안보우산과 자국의 경제적 우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데 따른 충격과 불안에서 촉발됐다.

일본은 이제 집단적 자위권, 해외 파병, 무기 수출, 군사비의 GDP 1% 상한제 폐기와 자위대의 보통 군대화, 핵개발 등 오랫동안의 군사적 금기들을 과감하게 파기하면서 이를 위한 헌법 9조 개정도 가시화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체제라는 두꺼운 껍질이 깨지고 일본의 ‘혼네’(속내)가 마침내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구성에서도 예컨대 2030년께면 중국 인구는 그 정점에 이르러 대외 지향 역시 정점에 이를 것이고, 반면에 고령화한 일본은 그 무렵 외부에 신경쓸 여력조차 지닐 수 없는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각국의 민족주의 대두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전반적인 반미 무드 고조,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닌 중-일 간 또는 일-한-중 간의 상호 반감도 가세한다.

일본 그리고 한국과의 양자 관계를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앞으로도 강화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젠 이런 위험한 격동에 대처할 수 없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동아시아 개입 정책이 필요하다. 향후 5~10년이 앞으로 반세기 또는 그 이상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레이니 등의 주장이다.

그런 위업을 부시가 해냈는데, 실패라니

하지만 빅터 차의 생각은 다르다. 부시 정권은 중국의 역할 강화를 용인하는 한편 미-중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을 자신의 자장 속에 포섭함으로써 미국과 아시아의 이익을 지켜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미-중 관계 강화로 미-일 동맹 강화에 대한 중국의 의심을 불식시켰으며, 또 이를 통해 미국은 재무장·군사대국화·보통국가화한 친미적 글로벌 플레이어로 일본을 개조해 미국의 세계 전략에 가담케 한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 미-중 관계 강화는 미-일 관계 그리고 일-중 관계 강화와 더불어 미국이 주도하는 황금의 주요 삼각구도를 끌어내고, 한-미-일 공조라는 보조 삼각구도를 재강화함으로써 적어도 당분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빅터 차는 자신한다. 그런 위업을 부시 정권이 해냈는데, 실패라니!

결국 냉전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미국 주도하의 2차 대전 이후 체제를 21세기에도 연장하되 거기에 지금까지 소외시켰던 중국까지 끌어들여 더욱 확장한 뒤 신장개업하자는 게 빅터 차의 생각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변수는 일본의 재무장(핵무장만은 여전히 미국에 맡기고)을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의 보조군사력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 하부 체제로 한-일 군사동맹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 철저히 미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그의 뜻대로 잘 굴러갈지 의심스럽지만(이 판에 중국, 일본이 과연 미국을 신뢰할까?), 이미 1세기를 버텨온 이 ‘낡아빠진 새 버전’ 때문에 자신의 모국과 동포들에게 밀어닥칠지도 모를 재앙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해봤는지 궁금해진다. 한국의 정치 지형은 그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세력이 일단 대세를 장악했다. 또다시 반세기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을 그들이 좌우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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