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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친미우파가 뭘 잃어버렸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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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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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 정권 ‘신자유주의’ 10년이 섭섭하다는 건 양지에서만 살던 자들의 뒤틀린 심사일 뿐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미국 중앙정보국(CIA) 인터넷 사이트 월드팩트북에 떠 있는 각국 사정을 보면, 2006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은 공식환율 기준으로 8974억달러. 그 바로 위에 물가 등을 감안한 실질 구매력지수(PPP)를 기준으로 한 GDP 수치는 1조1960억달러. 따라서 같은 기간 PPP 기준 한국 1인당 GDP는 2만4500달러다.

일본이 같은 기간 PPP 기준 GDP가 4조2180억달러, 1인당 GDP 3만3100달러. 중국은 GDP 10조2100억달러(공식환율 기준 2조5270억달러), 1인당 GDP는 7800달러. 필리핀은 GDP 4498억달러, 1인당 GDP 5천달러. 러시아는 GDP 1조7460억달러(공식환율 기준 7336억달러), 1인당 GDP 1만2200달러.

2007년 12월19일 밤 당선이 확정된 직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청계광장을 방문해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산케이신문>의 자가당착

적어도 통계상으론 한국의 최근년 실적은 나쁘지 않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냉전 붕괴와 때를 같이해 80년대 중반 이후의 놀라운 거품경제가 한꺼번에 꺼지면서 장기 불황이 이어지자 유행한 게 ‘잃어버린 10년’ 타령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선 거품과 잃어버린 10년의 주역이 자민당이라는 집권세력이었지만 한국에선 거품 붕괴와 함께 정권이 바뀌어 나라를 부도낸 세력과 부도난 나라를 떠맡은 세력이 달랐다. 그래서 나라를 부도낸 세력이 2연패 뒤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떠드는 것이 뼈아픈 자성이거나 10년간 놓친 정권을 되찾자는 내부 결속용 다짐이라면 몰라도, 부도 사태 10년을 책임지라며 ‘잃어버린 10년을 돌리도’를 외친다면 자가당착이다.

지난 12월19일 대선 개표 도중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일본 <산케이신문> 워싱턴 특파원이 “미국 부시 정권은 (한국이) 보수정권으로 이행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환영하고 있다”며 이렇게 전했다. “한국 정세에 밝은 미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이명박씨에 대해 ‘정책과 신념을 부시 정권과 공유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좋아질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미 정부 전 고위관료)는 얘기가 있다. 지난해 9월 한-미 정상회의 때엔 <뉴욕타임스>가 ‘몇 개월 동안 (한-미) 쌍방 간의 도랑은 일본해(동해)만큼이나 넓어졌다’는 미 정부 고관의 얘기를 전했다.”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관계가 나빴나? 미군기지 평택 이전,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중동 지역 파병,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쇠고기 수입, 북핵 문제, 6자회담 등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었고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야릇한 용어까지 유행시키지 않았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등장했을 때 당황과 불쾌 속에 가장 분통 터진 자들은, 아마 그전의 서울 정권들과 수십 년간 유착 속에 인맥을 구축하고 봄날을 구가하던 워싱턴의 정치인들과 동북아, 한반도 담당 관리들, 한국통으로 알려진 동북아 전문가들, 언론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산케이>가 전한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선임연구원이 ‘노무현과 부시는 정책과 신념이 맞지 않아 관계가 나빴다’고 말한 거나,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거니 ‘한-미 간 도랑이 동해만큼이나 넓어졌다’거니 하는 얘기들은 실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양지에서만 살던 자들의 뒤틀린 심사를 반영한 게 아닐까.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이던 나라가 정권교체와 함께 어느 날부터 예전처럼 주무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는 데 대해 몹시 화를 내고 초조해하며 새 집권세력을 “버릇없는 놈들” “무능한 좌파들” 따위로 저주했다. 대저 한국의 보수 유력지들이 ‘미국의 입장’이라며 시시콜콜 전한 워싱턴 풍향이라는 게 실은 그런 작자들의 사감에 가득 찬 편견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그들과 동맹하며 양지에서만 살아온 국내의 ‘봄날 구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정권교체와 함께 태평양 양쪽의 그들은 전에 없이 한통속이 돼 권토중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10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그들은 마침내 성공했다. 축하한다.

10년간의 절치부심, 축하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유독 그토록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는 나로선 여태껏 의문이다. 나는 노 정권과 아무 인연도 없고 지난 5년 딱히 덕본 것도 없지만 손해본 것도 없었다. 노 정권 등장 뒤 인상적이었던 일 중 하나는 가끔 택시를 탈 때 마주친 운전사 양반들 언행이었다. 처음엔 어쩌다가 그랬는데, 점점 빈도가 심해지더니 정권 중반 이후에는 택시 타기가 고역이었다. 열이면 아홉이 먼저 얘기를 꺼내곤 곧바로 정권 욕을 해대며 동의를 구해오는 상황 자체가 힘들었다. 좁은 택시 안에서 저쪽이 뭐라 하는데 이쪽이 그냥 입 다물고 있기도 그렇고, 대꾸하다 보면 끝이 없고. 거참, 좀 조용히 살고 싶었건만.

모두라곤 못하겠지만, 그런 얘기 대부분은 판박이처럼 거의 꼭 같았다. 바로 도쿄의 우파 <산케이>가 대변한 워싱턴 우파들 얘기처럼, 양지에서만 살다 졸지에 음지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던 자들 얘기, 그들과 동맹한 서울의 절치부심파들 얘기를 지겹도록 외어댄 국내 유력 보수지들 논리. 사실 짜증났던 건 그 때문이었다. 김·노 정권이 덥석 손잡은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들이 일자리 만들어준다는 얘기에 솔깃해 권토중래·절치부심파들 손을 들어준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이 ‘신자유주의 10년’을 얘기한 거라면 기꺼이 동의하겠다. 그렇다면 김·노 정권을 반미·좌파·반신자유주의로 몰아댄 친미·우파·급진 신자유주의 세력이 ‘신자유주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저주한다는 건 웃기지 않나. 장차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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