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두려워하는 동아시아 역내권에서의 배제… 주변 초대국을 견제하고 자존하는 길은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미국의 지역, 그리고 글로벌 패권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1998년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클린턴 정권이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 움직임을 깨부순 일을 상기하라. 그것은 재무관리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지정학적 야망에 따른 행동이었다.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에는 미국한테 최대의 위협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로 AMF나 미국을 배제 내지 주변화하는 무역권의 출현을 들고 있다.
△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화해와 새로운 차원의 이념을 구축할 수 있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연합은 주변 초대국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이이제이, “분할해서 공략하라”
1947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라는 퀘이커교도 사회활동 단체의 평화경제안전보장 프로그램 부장 조지프 거슨은 일본 내의 ‘평화헌법’ 지지운동과 연대하자며 쓴 글에서 그렇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가 한 그 다음 말이 우리에겐 의미심장하다. “문화적 차원에서도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이 영어보다 중국어 공부에 더 많이 쏠리게 된 것은 장래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미국이) 단명으로 끝난 아베 정권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초국가주의를 부추기고 헌법 개정과 미-일 군사동맹 강화,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분할해서 공략하라’는 오랜 제국 지배의 통치술에 따라 일본과 북한, 중국 사이의 긴장을 부채질하는 이상적인 수법이었다.”(<세카이>(世界) 2007년 12월호에서 재인용)
미국의 대일정책과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을 포함한 대한정책까지도 중국 포위망 구축 전략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거슨은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10여 년 뒤면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대국으로 등장할 중국과의 관계를 단순한 대립 구도로만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중국의 상호 의존(중국의 현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경제적 성공의 최대 기여자는 미국과 미국 시장이며, 대신 미국 경제는 중국의 값싼 수출품과 미국 채권 매입으로 미국 재정 적자를 메워주는 막대한 중국 보유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해가고 있다)과 알력이 교차하는 현실은 미국의 대중 봉쇄와 포섭(관여)이라는 상호 모순적인 정책의 동시 병행 추진과 짝을 이룬다.
어쨌거나 거슨이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이 영어보다 중국어 공부에 더 열을 내게 된 현실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장래 위상을 가늠케 하는 중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그것은 한국이란 나라가 처한 식민지적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미국임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그런데 거슨은 이런 시절이 머지않은 장래에 종말을 고할 것임을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어 쏠림을 통해 예감하고 있다. 거대 중국의 등장이라는 객관적 정세 변동과 조응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지향 변화는 부시 1기 정권 때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아미티지와 클린턴 정권 내내 국방 차관보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요리한 나이와 같은 초당파적 미국 지배 엘리트들이 저지하려 애써온 AMF의 출현, 그리고 미국의 동아시아 역내권에서의 배제 내지 주변화를 잠수함 내의 토끼처럼 예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미국 엘리트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다. 바로 “분할해서 공략하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그들에겐 비책이다. 일본에 헌법 개정과 자위대 강화를 압박하면서 중국과 거래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을 방해하고, 대만을 끼워넣어 중국과 일본을 자극하며,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과 일본을 경쟁케 하고, 북한 핵문제 제기로 한국과 일본을 자신 쪽으로 얽어매는 따위가 다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한-미 FTA로 덥석 달려간 것은 미국의 이런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기막히게 부합한다. 일본과 중국에 어찌 뒤질쏘냐, 한발 앞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게 구한말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앞서가기 위한 돌파구다, 라고 생각했을까. 미국의 주표적은 당연히 일본과의 FTA 체결이다.
한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라
일본어로 쏠렸다가 영어로 러시아어로 쏠리고, 다시 중국어로 쏠리는 가련한 한국 젊은이들의 동향은 그냥 일반적인 약자의 비애라기보다는 역시 식민지적 상황이 빚어낸 특수성의 발현이 아닐까. 시속의 변화에 남보다 먼저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금방 몰락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 바닥이 좁고 얕은 것이다. 대중은 지난 1세기의 체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분단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런 식민지적 상황을 탈출할 출구가 없어 보이지만, 식민지적 상황을 탈출하지 못하는 한 분단 극복이 어렵다. 악순환의 고리를 창조적으로 끊어버려야 한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곤 하나 역시 식민지적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본의 처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 우익은 다시 메이지 성공신화에 매달리고 있지만 그것은 해답이 못 된다. 기껏해야 일본 전후 민주주의를 박살내고 또 다른 진주만과 히로시마의 비극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것보다는 통일된 한반도와 일본의 연합 쪽이 장차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라는 주변 초대국들을 견제하고 자존하는 데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연합은 그럴 만한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다. 문제는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한 화해와 새로운 차원의 이념 구축이다. 출구는 거기다. 장차 한-일의 연대는 그런 인식 지평 위에 펼쳐져야 한다. 퇴행적인 우익 세계관으로는 불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