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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100년을 뒤집을 개벽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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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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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는 동아시아 지정·지경학을 바꿔놓을 대지각변동의 전주곡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 사이트 11월15일치 ‘독자들이 던지는 10가지 질문’ 코너에 답변자로 나온 강경 네오콘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은 왜 핵개발국들을 재단하는 기준이 나라마다 다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라마다 다르니까. 나는 아이슬란드가 핵무기를 갖는다 해도 영국이 핵무기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이란이나 북한은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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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전 유엔 미 대사 발언의 변화

딕 체니 부통령의 비공식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볼턴의 발언은 미 행정부 내 매파들의 시각을 대변한다. 볼턴은 자기 주변에 고착된 체험과 빈곤한 상상력이 빚어낸 이기적 고정관념에서 인간이 벗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세계와 인간의 생존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그런 자들이 미국 핵정책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핵개발을 해도 괜찮고 북한과 이란은 절대 안 된다는 정책은 그런 수준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마당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장차 북한, 이란이 미국과 잘 지내게 되면 그땐 핵개발을 해도 좋다는 얘긴가. 핵무장한 아이슬란드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면 그땐 어쩔 건가. 그리고 미국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반미 약소국의 핵보유를 겁내지만 북한은 무려 반세기 이상 나라 전체를 날려버릴지도 모를 최강대국의 핵위협 공황 속에서 전전긍긍해왔다는 사실을 볼턴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영국(블레어), 일본(아베)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부시 정권 무조건 지지 태도를 취했던 ‘아부(푸들) 총리(존 하워드)’가 선거에 대패해 물러남으로써 ‘테러와의 전쟁’(부시의 전쟁)은 날개가 꺾였다. 하워드의 참패가 야당인 노동당 지지 여론 때문이 아니라 반하워드, 반전 여론 때문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부시 정권이 최근 북한에 대한 정책을 대폭 수정하고 있는 것도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전, 중간선거 패배와 함께 이런 동맹국의 정치 상황 변화가 한몫했을 것이다. 상황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11월16일 일본 새 총리 후쿠다 야스오가 집권 뒤 첫 해외 방문국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거기서도 당연히 북핵 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거론됐는데, 그 무렵 일본에선 ‘납치피해자가족회’, 그 지원단체인 ‘구하는 모임’, 그리고 초당파 국회의원 지원모임인 ‘납치의원연맹’ 방미단도 워싱턴으로 몰려갔다. 이들이 가서 만난 사람이 누구냐? 바로 볼턴이었다. 이들은 볼턴에게 부시 대통령이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 없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절대 빼지 말도록 말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볼턴은 “전적으로 동감”이라면서도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흐름을 막기는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요한 발언이다. 그 무렵 국무부 대변인도 “납치 문제가 반드시 북핵 문제와 구체적으로 관련돼 있는 건 아니다. 북핵 프로그램이 무력화되고 핵시설이 해체되면 지정 해제로 갈 수 있다”고 얘기했고, 회담 뒤인 22일에도 국무부 고위관리가 북핵 프로그램 무력화가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어 테러지원 국가 지정과 적대국과의 통상법에 따른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것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자회담 목표와 합치한다며, 모처럼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납치피해자가족회는 “그냥 인사하러 미국에 갔느냐”며 후쿠다 총리를 닦달했다. 정상회담 때 부시는 고작 ‘납치 문제를 잊지 않겠다’는 말만 했던 것이다. 납치피해자가족회로서는 좌절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 선회는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중대한 변화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장차 동아시아 지정·지경학을 바꿔놓을 대지각변동의 전주곡일 수도 있다.

주한미군, 주일미군이 의미를 잃게 되면…

북한이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빠지고 적대국 통상법에 따른 제재에서도 풀려난다는 건 북-미 관계 정상화로 간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최대 적대세력임을 전제로 한 일본의 대북·대외 정책, 군사·안보 정책 근간이 흔들리고 국내 정치도 격동에 휘말리게 된다.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는 속에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할 이유가 희박해진다. 그럼에도 눌러앉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중국을 겨냥하겠다는 것인데, 미국이 그런 뻔한 수를 밀고 가기 힘들고 중국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 의미를 상실하면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는 주일미군도 비슷한 처지로 내몰린다. 중국은 점점 강력해지고 한반도가 통일로 나아가는데도 일본은 계속 미국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늘어질까. 국가들의 동맹관계란 상황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폐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전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그런 정세 변동이 지난 1세기, 짧게 잡아도 반세기 이상 우리를 옭아매온 비극적 상황의 종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일본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하고 영국·미국의 패권주의자들이 공모해온 메이지유신 이래의 한반도와 그 주변에 대한 분할통치 및 약탈체제의 종식을 뜻한다. 한민족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갔던 식민과 분단과 전쟁과 대결의 100년 세월이 마감되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이런 개벽의 꿈을 스스로 짓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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