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베트남 난민이 미군 철수 때문이라고? 부시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철수 반대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가 살인통치를 시작해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굶주림이나 고문, 처형으로 숨졌다.” “베트남에서는 예전의 미국 동맹자들, 정부 일꾼들과 지식인, 그리고 사업가들이 감옥에 갇혀 수만 명이 희생됐다. 수십만 명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보트를 타고 그 나라를 떠났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중국해에 빠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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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해서가 아니라 개입해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22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미국 해외참전용사회 연례모임에서 40여 분간 연설했다. 그때 이라크 파병 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들며 거론한 얘기다. 모두 미군이 철수해버리는 바람에 빚어진 비극이라는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의 살인통치는 어떻게 시작됐던가? 캄보디아 공산주의 세력 크메르루주의 수장은 폴 포트(1925~98)였다. 프랑스가 식민통치하던 캄보디아 농민의 아홉 형제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난 폴 포트는 1949년 24살 나이에 무선공학을 공부하러 종주국 수도 파리에 유학갔다가 공산주의자가 돼 1953년 귀국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 인민군에 참패한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고 노로돔 시아누크가 집권했다. 오랜 지하활동 끝에 폴 포트는 1962년 캄보디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다. 마오주의자였던 그는 중국의 지원 아래 1967년부터 무장봉기 전략을 구사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원용한 폴 포트는 완전 평등주의와 토지균분론을 꿈꾼 원시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다. 프랑스를 대신해 인도차이나에 개입한 미국이 1965년 2월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시아누크는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캄보디아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 휘하의 군사조직 베트콩(Viet Nam Cong San =Vietnamese Communists)이 이용하는 군사거점(시아누크 루트)이 됐다. 시아누크가 모스크바를 거쳐 베이징을 방문하고 있던 1970년 3월 미국이 지원하는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 다음달인 4월 론 놀은 호찌민 루트를 파괴하려던 미국 리처드 닉슨 정권의 캄보디아 침공을 허용했다. 베트남 주둔 미군과 베트남 정부군이 캄보디아로 밀고 들어가자 론 놀 반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폴 포트는 시아누크파의 지원 속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 내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론 놀 정권의 통치 범위는 도시 지역에 국한됐다. 1973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차이나 정세는 요동쳤다. 1975년 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에 이어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고 론 놀은 미국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크메르루주의 대숙청이 시작됐다. 크메르루주는 “혁명의 은혜는 농촌 노동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며 도시거주자, 자본가, 기술자, 학자, 지식인 등 유산·유식 계급의 재산과 지위를 박탈하고 그들을 도시 바깥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농사를 짓게 했고, 반란을 도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 중 리더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른바 ‘킬링필드’ 얘기다. 1978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크메르루주는 국경 지역 밀림으로 들어갔고, 베트남은 자국에 망명해 있던 헹 삼린을 앞세워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중국 손을 잡고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온 미국은 마오이스트 폴 포트가 반소련주의자였기 때문에 친소련인 베트남이 밀었던 헹 삼린보다 그를 지지했다.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욕심 때문에 론 놀 쿠데타 지원과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집권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전까지 캄보디아 공산주의 세력은 미약했다. 킬링필드가 미군 철수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는 부시의 시각은 피해망상인가 과대망상인가. 미국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란 얘긴가. 만일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지 않았다면, 아니 패퇴한 프랑스를 대신해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지만 않았더라도 (2차) 베트남전쟁은 물론 캄보디아, 라오스의 정변과 살륙은 없었을 것이다. 폴 포트의 광기조차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충격에 가위눌린 피억압 민족의 강렬한 저항 내셔널리즘과 해방사상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 침략이 낳은 사생아다. 성공작은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철수도 없었으려니와, 베트남인들의 항변처럼 미군 철수 전에 이미 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고 국토도 초토화됐다. 미군이 철수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계속됐고 대량살륙과 파괴도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자기들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어떤 해코지도 한 적이 없는 한 나라의 산업과 문화와 삶, 그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버린, 몇 세기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흔을 남긴 그 처참한 전쟁을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만 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돼 있다. 그는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아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일본을 들었다. 그래서 베트남은 실패작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건데, 그는 자신들의 실패가 상대의 성공이 되고 그것이 도덕적 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한통속이 된 전범국 일본은 그렇다 치고, 점령과 분단과 전쟁을 거쳐 수백만이 죽고 1천만이 이산한 한반도 현대사가 대표적 성공작이라니!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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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해서가 아니라 개입해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22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미국 해외참전용사회 연례모임에서 40여 분간 연설했다. 그때 이라크 파병 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들며 거론한 얘기다. 모두 미군이 철수해버리는 바람에 빚어진 비극이라는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의 살인통치는 어떻게 시작됐던가? 캄보디아 공산주의 세력 크메르루주의 수장은 폴 포트(1925~98)였다. 프랑스가 식민통치하던 캄보디아 농민의 아홉 형제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난 폴 포트는 1949년 24살 나이에 무선공학을 공부하러 종주국 수도 파리에 유학갔다가 공산주의자가 돼 1953년 귀국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 인민군에 참패한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고 노로돔 시아누크가 집권했다. 오랜 지하활동 끝에 폴 포트는 1962년 캄보디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다. 마오주의자였던 그는 중국의 지원 아래 1967년부터 무장봉기 전략을 구사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원용한 폴 포트는 완전 평등주의와 토지균분론을 꿈꾼 원시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다. 프랑스를 대신해 인도차이나에 개입한 미국이 1965년 2월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시아누크는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캄보디아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 휘하의 군사조직 베트콩(Viet Nam Cong San =Vietnamese Communists)이 이용하는 군사거점(시아누크 루트)이 됐다. 시아누크가 모스크바를 거쳐 베이징을 방문하고 있던 1970년 3월 미국이 지원하는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 다음달인 4월 론 놀은 호찌민 루트를 파괴하려던 미국 리처드 닉슨 정권의 캄보디아 침공을 허용했다. 베트남 주둔 미군과 베트남 정부군이 캄보디아로 밀고 들어가자 론 놀 반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폴 포트는 시아누크파의 지원 속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 내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론 놀 정권의 통치 범위는 도시 지역에 국한됐다. 1973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차이나 정세는 요동쳤다. 1975년 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에 이어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고 론 놀은 미국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크메르루주의 대숙청이 시작됐다. 크메르루주는 “혁명의 은혜는 농촌 노동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며 도시거주자, 자본가, 기술자, 학자, 지식인 등 유산·유식 계급의 재산과 지위를 박탈하고 그들을 도시 바깥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농사를 짓게 했고, 반란을 도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 중 리더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른바 ‘킬링필드’ 얘기다. 1978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크메르루주는 국경 지역 밀림으로 들어갔고, 베트남은 자국에 망명해 있던 헹 삼린을 앞세워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중국 손을 잡고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온 미국은 마오이스트 폴 포트가 반소련주의자였기 때문에 친소련인 베트남이 밀었던 헹 삼린보다 그를 지지했다.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욕심 때문에 론 놀 쿠데타 지원과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집권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전까지 캄보디아 공산주의 세력은 미약했다. 킬링필드가 미군 철수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는 부시의 시각은 피해망상인가 과대망상인가. 미국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란 얘긴가. 만일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지 않았다면, 아니 패퇴한 프랑스를 대신해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지만 않았더라도 (2차) 베트남전쟁은 물론 캄보디아, 라오스의 정변과 살륙은 없었을 것이다. 폴 포트의 광기조차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충격에 가위눌린 피억압 민족의 강렬한 저항 내셔널리즘과 해방사상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 침략이 낳은 사생아다. 성공작은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철수도 없었으려니와, 베트남인들의 항변처럼 미군 철수 전에 이미 미국의 부당한 개입으로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고 국토도 초토화됐다. 미군이 철수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계속됐고 대량살륙과 파괴도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자기들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어떤 해코지도 한 적이 없는 한 나라의 산업과 문화와 삶, 그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버린, 몇 세기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흔을 남긴 그 처참한 전쟁을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만 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돼 있다. 그는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아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일본을 들었다. 그래서 베트남은 실패작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건데, 그는 자신들의 실패가 상대의 성공이 되고 그것이 도덕적 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한통속이 된 전범국 일본은 그렇다 치고, 점령과 분단과 전쟁을 거쳐 수백만이 죽고 1천만이 이산한 한반도 현대사가 대표적 성공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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