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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전히 가쓰라와 태프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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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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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와의 역사서를 보며 느낀 ‘얄궂음’… 무엇보다 1905년 러일전쟁, 1945년 러시아 대일공격 모두 피해자는 조선인 것을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얄궂게도 두 전쟁 모두 미국 대통령- 1905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1945년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의 승낙을 얻어 감행한 공격이었다.”

일본 고단샤(講談社)의 25권짜리 <세계의 역사> 제18권 <러시아와 소연방>의 필자 도가와 쓰구오는 그렇게 썼다. 두 전쟁이란, 하나는 1945년 8월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틀 뒤 대일 선전을 포고한 소련 군대가 만주, 한반도 쪽으로 밀고 내려온 전쟁이고, 또 하나는 그 40년 전인 1905년 일본군이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점령한 러일전쟁을 말한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로 들어와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을 받는 미군정 하지 준장. 일본이 쉽사리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도록 한반도 반쪽을 내주는 선물을 안겼다.


가쓰라의 궤변과 태프트의 맞장구

“소련군 사령관은 이 전투(1945년 사할린전투)에서 1만8320명의 포로를 붙잡았다고 발표했으나, 이때 소련 점령하의 사할린에 있던 일본인은 30만 이상이었다. 미국 역사가 스티븐은 1905년 일본의 사할린 공격과 이때(1945년) 소련의 사할린 공격 사이의 눈에 띄는 유사성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어느 쪽이나 적이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전쟁 말기를 택해 공격을 감행했으며, 그 목적도 조약을 파기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 말기의 일본군 공격은 쿠릴열도와 사할린 교환조약의 폐기를 목적으로 삼았고, 2차 대전 말기의 소련군 공격은 포츠머스조약의 파기를 노렸다.”

참으로 ‘얄궂게도’ 그 두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그러나, 소련도 일본도 아닌 조선이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려던 영국과 더불어 일본을 적극 도왔던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국면에서 재빨리 중재에 나서 1905년 9월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맺게 했다. 북위 50도 이남과 연해주 어업권이 그때 일본에 넘어갔다.

그 두 달 전인 그해 7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자국 식민지였던 필리핀 시찰 명목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특사 태프트는 7월27일 당시 일본 총리이자 임시로 외상도 겸하고 있던 가쓰라 다로를 만난다. 그때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정부를 방치해둘 경우 또다시 타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말려들게 할 것이니,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실은 태프트는 가쓰라가 그런 주장을 읊조리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서 일본의 유일한 이익은 자신의 견해로는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도 우호적인 국가에 의해 필리핀이 통치되는 데 있으며, 이 군도가 자치에 부적합한 원주민의 잘못된 정치 아래 놓이거나 비우호적인 몇몇 열강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짜고 친 제국주의 침략자들 간의 담합,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7월29일 당시 새 국무장관에 임명된 루트(Elihu Root)에게 보고됐고, 루스벨트는 7월31일 가쓰라-태프트 회담 내용은 전적으로 합당하다는 것, 그리고 태프트가 얘기한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했다는 것을 가쓰라에게 전하라는 전문을 태프트에게 보냈다. 그런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강화 중재 명목으로 노벨평화상을 탔으며, 그의 뒤를 이어 미국 제27대 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 때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 방송을 한 1945년 8월15일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일본군 항복에 관한 일반명령 제1호를 발송했다. 거기에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아낼 지역으로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조선(한반도), 사할린”이 명기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 다음날 그해 2월에 열렸던 얄타회담 약속에 따라 쿠릴열도와 홋카이도 북쪽 절반도 소련군 점령지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항의했고, 트루먼은 홋카이도 절반은 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분단을 면했고, 한반도 주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영토와 함께 남북으로 분단당했다.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외치는 그들

역사가 스티븐이 얄궂게도 1905년과 1945년 전쟁 모두 루스벨트란 이름의 미국 대통령들이 주역을 담당했다고 한 건, 트루먼은 얄타회담 2개월 뒤 갑자기 뇌일혈로 타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리집행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1943년 11월 말 테헤란에서 스탈린, 처칠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독일 항복 뒤 소련군의 대일 참전 약속을 스탈린한테서 받아냈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뒤 2~3개월 안에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이 쉽사리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미국은 한반도 반쪽을 내주는 등의 선물을 안기며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계속 압박했으나 1945년 7월 말 독일(그해 5월 초 항복) 땅에서 열린 포츠담회담에 루스벨트 대신 참석한 트루먼은 자국의 원폭실험 성공 보고를 받고 이후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의 내밀한 항복협의 주선 요청도 묵살한 채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틀 뒤 재빨리 대일 공격을 시작했다.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미국은 남한과 일본, 그리고 대만이라는 사실상의 섬들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해서 나눠진 세계를 확정하고 그 뒤 반세기 동안 지속된 ‘냉전’의 본격 신호탄이 터진 건 5년 뒤인 1950년 6월이었고, 다시 한반도가 전장이 됐으며, 그것은 분단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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