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지배와 냉전의 대리전,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은 많이 닮았는데…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인도 왼쪽 서북방에 파키스탄이 있고, 그 바로 왼쪽 위에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또 그 왼쪽에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이란이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바로 위에 투르크메니스탄 등 옛 소비에트연방 소속 중앙아시아국들이 펼쳐져 있고, 그 왼쪽에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러시아가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호수 같은 바다가 카스피해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제국에 편입됐고,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가 정복했으며, 이후 박트리아 왕국 등이 거쳐갔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는 1747년 파슈툰족이 세운 두라니왕조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파이프라인 독점을 위해 탈레반을 지원하다
19세기에 남하정책을 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밀고 내려오자 아시아 침탈로 재미를 보고 있던 영국은 ‘대영제국 왕관의 보석’ 인도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아프간을 완충국으로 만들기 위해 내정에 개입하고 군대를 보낸 영국과 러시아가 그 중앙·서남 아시아 지배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면서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아프가니스탄을 주무대로 삼아 펼쳐진 이 두 제국의 충돌을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 그들은 부른다.
제1차(1838~42), 2차(1878~81) 아프가니스탄전쟁을 통해 결국 영국은 아프간을 ‘보호국’화했다. 그 무렵 일제가 조선에 원용한 바로 그 수법이다. 앵글로-아프간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아프간전쟁이란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제3차(1919) 아프간전쟁을 거쳐 아프간에 독립 왕정이 들어섰으나,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나 공화정이 탄생했다. 5년 뒤인 1978년 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1979년엔 소련이 친소 공산정권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개입했다. 10년간 온갖 첨단무기와 정규군 수십만 명을 투입한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영국을 대신한 신흥제국 미국이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무슬림 전사 무자헤딘 지원에 나섰다. 그 전쟁은 냉전이 열전화한 국지적 대리전쟁이기도 했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은 그런 성격의 전쟁 중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소련의 패배로 끝났다. 1989년 10만의 소련군이 철수한 뒤 황폐한 아프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자헤딘과 정부가 대립하고 다시 내분에 휩싸인 무자헤딘들이 갈라서고 끝없는 내전이 시작됐다.
1994년 아프간 동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을 ‘학생들’(탈레반)이라고 부르는 무장세력이 등장해 급속히 세력을 불리더니 불과 2년여 만인 1996년 대세를 장악했다. 탈레반 뒤에는 파키스탄이 있었고, 그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파키스탄은 괴뢰정부를 세워 아프간을 지배함으로써 중앙아시아 무역, 카스피해 지역으로 이어진 파이프라인 독점 등의 경제적 야심을 채우고,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에 아프간을 이용하려는 계산으로 군 첩보기관 ‘통합정보국’(ISI)을 앞세워 개입했다. 미국은 자국에 유리한 지역 정세 재편과 중앙아시아 석유·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해 탈레반을 지원했다.
카스피해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나오는 파이프라인이 원격지 석유 수출을 위한 최단거리의 항구와 연결되려면 서쪽의 흑해나 지중해, 아니면 남쪽의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 쪽으로 뚫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서쪽 길은 러시아나 러시아의 간섭을 받는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터키 등을 거쳐야 한다. 서방국들로선 불편하고 위험하다. 남쪽 이란을 통하면 간단한데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래 이란은 반미적이다. 미국-이란의 오랜 반목이 어디에 연유하는가. 지미 카터 정권 때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내고 빌 클린턴 정권 때도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은 미국이 그 지역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 맨얼굴을 보여준다.
석유 브로커, 아프간 대통령
미국이 안전하게 중앙아시아 석유자원을 빼내는 유력한 방법 중 하나는 옛 소련의 중앙아시아 연방국들과 아프간, 파키스탄을 파이프라인으로 관통하는 것이다. 아프간 대통령이 된 하미드 카르자이는 그때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 2위의 석유기업 유노컬의 컨설턴트 자격으로 카스피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간~파키스탄~아라비아해(인도양)로 빼내는 미국의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당시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보도했다.
미국은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석유산업 큰손들이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브레진스키, 콘돌리자 라이스 등 역대 국무장관과 대통령 안보보좌관들도 석유기업 아모코, 셰브론의 이사였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유지하자면 치안이 확보돼야 한다. 미국은 탈레반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파키스탄을 앞장세워 키웠다.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 주재 미국대사관 폭탄 테러와 친미 오사마 빈라덴의 반미 전향 이후 탈레반과 미국은 갈라섰다. 9·11 사태 뒤 미국은 탈레반에 밀린 무자헤딘 반군들의 연합인 북부동맹을 앞세워 다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다시 석유 브로커 카르자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한반도의 약 3배 넓이인 척박한 아프간에는 약 3200만 명이 살고 있고 그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구매력 평가지수로 800달러 정도. 인구의 40% 이상이 실업자며 53%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미 중앙정보국(CIA) 월드팩트북). 오랜 세월 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탐욕이 망쳐놓은 그 불행한 땅에 우리는 또 무슨 악연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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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의 침공에 맞서 싸움에 나선 아프간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이 험한 바위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79~89년 아프간전쟁은 미소 냉전의 대리전으로 치러졌다.(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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