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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FTA와 중국 쇠고기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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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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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가 통하는 사회는 어떻게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리는가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용산 전자상가에서 이것저것 묻다가 그냥 가려는 손님에게 “맞아볼래?”식으로 행패를 부린 어느 못난 가게 점원 얘기가 뉴스를 탔다. 그 무렵 중국 쇠고기 캔을 들여와 한우 갈비탕을 만들어 판 얘기도 텔레비전 화면에 나왔다. 중국 쇠고기 캔을 한 통에 5천원씩에 사와서는 그걸로 그보다 더 비싼 갈비탕 10그릇을 만들어 한우 갈비탕이라 속여 팔았다. 역시 같은 시기 서울 시내 한 지역 초등학교들에 관한 괴담도 화면에 떴다. 한 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40명이 넘었는데, 거기서 불과 1km쯤 떨어진 다른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학급당 학생 수가 적으면 제대로 된 공부가 되겠거니, 학습 여건이 크게 개선되긴 한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면 물정 모르는 사람이다. 학급당 학생 수가 20명도 채 안 되는 학교는 주변에 임대아파트와 탈북자 집이 많았고, 그곳 학부모들이 어린 학생들을 앞세우고 그런 ‘기피시설’에서 대거 탈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값 내려갈까봐, 자식들 ‘나쁜 물’ 들어 출세에 지장 있을까봐. 그게 오직 교육 당국자의 무능과 정책 잘못 때문만일 리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는 것은 강자에 편승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편승 가능한 자는 소수 승자들뿐이다. 6월21일 오전 한-미 FTA 추가 협상 테이블에 앉은 협상단.(사진/ 사진공동취재단)


효율 극대화의 열매는 누구에게

계간 <환경과 생명>의 장성익 주간은 올 여름호에서 이렇게 물었다. “강한 자, 힘센 자, 높은 자, 잘난 자만이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또한 탐욕과 이기심, 타인에 대한 적대적 경쟁의식이 난무하는 곳에서 과연 따뜻한 인간의 온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낙오하거나 탈락하거나 뒤처지는 사람들은 궁핍과 소외와 차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이런 사막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마땅히 꽃피워야 할 삶의 가치들인 연대·평등·우정·환대·배려·협동 같은 것들을 제대로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삶의 여유와 재미는 철저히 저당 잡힌 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한마디로 무한경쟁의 차디찬 사다리를 남보다 한 칸이라도 더 빨리 기어오르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발버둥치면서 일하고 또 일해야 하는 이 지독한 ‘일중독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용산 전자상가 점원이나, 싸구려 중국 쇠고기를 비싼 한우 갈비라 속여 판 업자나, 임대아파트와 탈북 주민들을 사갈시한 ‘특별시민’은 모두 한통속이며, 이 무정한 사회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그들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방송 뉴스에서는 매일 그보다 더 참혹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이겨서 살아남기, 행동준칙은 돈, 삶의 의미도 오직 돈인 듯하다. 그렇게 돈에 쫓기고 가위눌리며 살아야 하는 그들은 피해자이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궁지에 몰고 죽여야 하는 가해자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 어쩌겠다는 것일까. 살아남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남는 게 목적인 사회는 강자를 숭배한다. 우리 사회의 끝없는 성장 열병, 선진국 콤플렉스는 그 전형이 아닐까. 미국과 일본에 대한 끝없는 열등의식과 숭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모두 강자가 될 순 없다. 최강자부터 최약자까지 일렬로 늘어세운 서열화야말로 경쟁사회의 존립 근거다. 산업혁명 이래 지구상 민족국가 집단 간의 서열 구조에 큰 변화는 없었다. 대체로 강자는 언제나 강자였고 약자는 약자였다. 자본주의 강자들은 피할 수 없는 평균이윤율 저하를 대외 팽창과 착취 구조 효율화로 보완해왔다. 신자유주의라는 것도 결국 강자가 이윤 극대화(착취의 다른 이름)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경쟁 규칙에 맞춰 모조리 문을 열도록 약자를 힘으로 강박하는, 그래서 동일한 규칙 속에서 자유롭게(사실상 오직 강자들만!) 거래하자고 압박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효율은 극대화하겠지만 극대화의 열매는 누가 가져가는가? ‘공정한 규칙’ 아래 복싱 헤비급 프로와 라이트급 아마추어가 사각의 링에서 싸우는 게 과연 공정할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는 것은 강자에 편승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편승 가능한 자들은 소수 승자들뿐이다. 그게 계급사회의 본질이다. FTA를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국익’이 구성원 모두의 이익인 양 호도하는 것은 사기다.

숫자가 주인 노릇하는 곳은 무덤

장성익 주간은 6월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한국 민주주의에 오히려 왜 조종이 울리고 있는지 지적했다.

“끝없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의 성취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허구적인 환상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맹목적인 경제성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이라는 통찰을 보다 진지하고도 겸허하게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가치가 오로지 ‘돈’이라는 잣대로만 재단되고 경제적 손익에 대한 이해타산이 판치는 곳에서, 달리 말하자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계산 가능한 것, 숫자로 환산되는 것이 주인 노릇하는 곳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약자를 짓밟고 멸시해도 ‘(공정한) 경쟁’ ‘합법’이란 이름으로 ‘양심’을 구제받을 수 있는 사회, 돈을 위해 타인을 속이고 죽이면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무덤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사회 자체가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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