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파의 악몽, 미국의 ‘중국 중심 체제’가 60년 전 짜였을지도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sdhan@hani.co.kr
중국이 민주화되고 미국이 그런 중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말하자면 미-중 관계의 비중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면, 미-일 동맹 강화를 축으로 한 미국의 기존 동아시아 전략은 크게 선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경우를 두고 사이토 구니히코 전 주미 일본대사는 “일본으로선 꿈도 꾸고 싶지 않은 악몽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워싱턴의 사쿠라> 스노하라 쓰요시 지음, 리북 펴냄)
1948년 냉전 설계자 케넌의 도쿄 방문
[%%IMAGE4%%] 중국의 ‘민주화’란 결국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중국 체제가 변화함을 의미한다. 사실 그게 민주화든 아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양국 이익 극대화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다. 만일 미국이 자국 아시아 정책에서 지금처럼 ‘주거래 국가’를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꾸는 게 훨씬 더 코드에 맞고 이익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순간 일본은 아시아에서 누려온 외교안보와 경제상 우월적 지위을 상실하게 된다. 악몽이다. 중국한테 밀리는 순간 일본은 거의 모든 걸 잃게 된다. 1990년대 후반 한때 중국 중시 정책을 쓴 빌 클린턴 정권 때 그걸 예감한 일본 우파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짓거리라고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교본이 되고 여러 변수들을 감안한 총체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며 미래를 그리는 데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가정이지만, 만일 아시아태평양전쟁 뒤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가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됐다면 일본의 운명은 물론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으며, 장제스를 지원하며 그가 이기기를 바랐다. 그렇게 됐다면 전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당연히 중국을 중심으로 짜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냉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일본은 아마 기껏 2류 국가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1948년 3월1일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이 도쿄에 갔다. 1947년 2월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그에게 정책기획국장직을 맡겼고, 그해 7월 그는 대소 봉쇄전략의 기본 이념이 된 ‘소련의 행동 원천’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X’라는 필명으로 <포린어페어스>에 실었다. 케넌은 중앙정보국(CIA) 내에 공산주의 활동에 대처하기 위한 대외 비밀공작 조직을 만들었다. 도쿄에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를 세 차례 만난 케넌은 맥아더의 기존 대일정책 수정을 서둘러야겠다고 결심했다. 냉전 쪽으로 기본 방향을 확정한 마셜 국무장관에게 맥아더는 이미 걸림돌이었다. 맥아더는 전범자 공직 추방을 통한 일본 정치 개혁, 재벌 해체 등에 연연하면서 여전히 친미 2류 국가로의 일본 ‘개조 계획’에 집착했다. 케넌은 일본에서 대기업 260개사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던 맥아더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소련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 중국과 필리핀에 있는 일제 공업시설을 전쟁 배상의 일환으로 그들 나라에 넘겨줄 경우 일본 재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 공산주의 활동을 막기 위한 반공치안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을 확인했다. 맥아더의 정책은 대소 봉쇄정책을 위해 일본을 재건해 반공의 교두보로 세워야 한다는 트루먼 정권의 생각과는 방향이 맞지 않았다. 케넌은 귀국 뒤 기존 대일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기밀문서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를 제출했고, 그해 6월 이를 기초로 새로운 대일정책 방향을 담은 국가안보회의(NSC) 제13호 문서가 작성됐다. 일본 위위 상실만 걱정하는 우파 장제스가 중국을 장악했다면, 설사 남북이 미국과 소련 의도대로 분단됐다 하더라도 소련은 북한의 남침(시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원을 거절했을 것이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항미 원조’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중심이 되고, 게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을 냉전의 거점으로 육성할 이유가 없었으며, 일본은 아시아 주변국과의 특권 없는 무한경쟁에 노출됐을 것이다. 또 일사불란한 자민당 장기 일당 체제를 보장한 1955년의 보수 합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를 일본에 의존한 지금까지 남한의 동아시아 내 대미·대일 종속적 위상과 유사한 대미·대중 종속적 지위로의 전락을 일본으로선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아시아 정책 거점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그런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 우파에겐 사활적인 요소다. 그래서 일본 우파 주류가 미-일 동맹 강화를 축으로 한반도 분단과 ‘깡패국가’ 북한 및 대미·일 종속국 남한의 적대적 대치, 삐걱거리는 미-중 관계, 신냉전적 대결 조짐을 보이는 미-러 관계 등을 기본 구도로 한 현상 유지를 갈망하는 것은 국가 전략으로선 영민하고도 당연한 방책이다. 스노하라 쓰요시는 졸지에 그런 구도가 무너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의 한 고리가 될 남북 통일도 그들로선 두려울 수 있다. 그쪽으로만 생각하는 게 바로 우파의 한계다. 이미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과거와 같은 압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중국을 잡느냐 일본을 잡느냐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어차피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 분단 한국은 그것까지 고민하고 대처해야 한다.
[%%IMAGE4%%] 중국의 ‘민주화’란 결국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중국 체제가 변화함을 의미한다. 사실 그게 민주화든 아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양국 이익 극대화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다. 만일 미국이 자국 아시아 정책에서 지금처럼 ‘주거래 국가’를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꾸는 게 훨씬 더 코드에 맞고 이익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순간 일본은 아시아에서 누려온 외교안보와 경제상 우월적 지위을 상실하게 된다. 악몽이다. 중국한테 밀리는 순간 일본은 거의 모든 걸 잃게 된다. 1990년대 후반 한때 중국 중시 정책을 쓴 빌 클린턴 정권 때 그걸 예감한 일본 우파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짓거리라고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교본이 되고 여러 변수들을 감안한 총체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며 미래를 그리는 데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가정이지만, 만일 아시아태평양전쟁 뒤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가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됐다면 일본의 운명은 물론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으며, 장제스를 지원하며 그가 이기기를 바랐다. 그렇게 됐다면 전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당연히 중국을 중심으로 짜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냉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일본은 아마 기껏 2류 국가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1948년 3월1일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이 도쿄에 갔다. 1947년 2월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그에게 정책기획국장직을 맡겼고, 그해 7월 그는 대소 봉쇄전략의 기본 이념이 된 ‘소련의 행동 원천’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X’라는 필명으로 <포린어페어스>에 실었다. 케넌은 중앙정보국(CIA) 내에 공산주의 활동에 대처하기 위한 대외 비밀공작 조직을 만들었다. 도쿄에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를 세 차례 만난 케넌은 맥아더의 기존 대일정책 수정을 서둘러야겠다고 결심했다. 냉전 쪽으로 기본 방향을 확정한 마셜 국무장관에게 맥아더는 이미 걸림돌이었다. 맥아더는 전범자 공직 추방을 통한 일본 정치 개혁, 재벌 해체 등에 연연하면서 여전히 친미 2류 국가로의 일본 ‘개조 계획’에 집착했다. 케넌은 일본에서 대기업 260개사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던 맥아더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소련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 중국과 필리핀에 있는 일제 공업시설을 전쟁 배상의 일환으로 그들 나라에 넘겨줄 경우 일본 재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 공산주의 활동을 막기 위한 반공치안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을 확인했다. 맥아더의 정책은 대소 봉쇄정책을 위해 일본을 재건해 반공의 교두보로 세워야 한다는 트루먼 정권의 생각과는 방향이 맞지 않았다. 케넌은 귀국 뒤 기존 대일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기밀문서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를 제출했고, 그해 6월 이를 기초로 새로운 대일정책 방향을 담은 국가안보회의(NSC) 제13호 문서가 작성됐다. 일본 위위 상실만 걱정하는 우파 장제스가 중국을 장악했다면, 설사 남북이 미국과 소련 의도대로 분단됐다 하더라도 소련은 북한의 남침(시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원을 거절했을 것이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항미 원조’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중심이 되고, 게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을 냉전의 거점으로 육성할 이유가 없었으며, 일본은 아시아 주변국과의 특권 없는 무한경쟁에 노출됐을 것이다. 또 일사불란한 자민당 장기 일당 체제를 보장한 1955년의 보수 합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를 일본에 의존한 지금까지 남한의 동아시아 내 대미·대일 종속적 위상과 유사한 대미·대중 종속적 지위로의 전락을 일본으로선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아시아 정책 거점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그런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 우파에겐 사활적인 요소다. 그래서 일본 우파 주류가 미-일 동맹 강화를 축으로 한반도 분단과 ‘깡패국가’ 북한 및 대미·일 종속국 남한의 적대적 대치, 삐걱거리는 미-중 관계, 신냉전적 대결 조짐을 보이는 미-러 관계 등을 기본 구도로 한 현상 유지를 갈망하는 것은 국가 전략으로선 영민하고도 당연한 방책이다. 스노하라 쓰요시는 졸지에 그런 구도가 무너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의 한 고리가 될 남북 통일도 그들로선 두려울 수 있다. 그쪽으로만 생각하는 게 바로 우파의 한계다. 이미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과거와 같은 압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중국을 잡느냐 일본을 잡느냐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어차피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 분단 한국은 그것까지 고민하고 대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