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무능에 지쳐 우파 실행가에 기대걸고 한 표 던진 프랑스 유권자들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신보수주의자, 신자유주의자, 친미파.’ 
 프랑스 제5공화국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52)를 장식하는 단어들이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친미파라면 대미관계가 지금까지의 자크 시라크 정권과는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시라크는 드골주의자답게 동맹관계는 유지하되 미국과 거리를 두는 프랑스 독자노선을 고집했다. 시라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고 비판했지만, 사르코지는 그런 시라크를 비판했다. 같은 우파지만 사르코지는 드골주의자가 아니다. 시라크는 사르코지보다는 귀족 출신 드빌팽 총리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그 때문에 사르코지와 그들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도쿄는 숨이 막히고 스모는 아둔해”
 
[%%IMAGE5%%] 발빠른 일본 언론들이 사르코지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2004년 1월에 홍콩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단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보단 중국이 좋다. 홍콩은 매혹적인 도시지만, 도쿄는 숨이 막힌다. 교토의 황궁(메이지 2년에 도쿄 쪽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천황 거소)은 초라하다. 유명한 정원도 음침했다.” “포마드를 바른 뚱뚱한 남자들끼리 싸우는 게 뭐가 그리 매력적이라는 건가. (스모는) 지적인 스포츠는 아니다.” 사르코지는 나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 아소 다로 외상이 그냥 있을 리 없다. “프랑스 쪽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신경쓸 것 뭐 있나. 최근까지도 프랑스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대해) ‘날생선을 그냥 먹다니’ 하고 흉보지 않았나.” 그렇다고 사르코지가 반일주의자란 건 아니다. 그는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 찬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시해왔다. 문제는 시라크가 일본을 무척 좋아하고 대일관계에 상당히 신경써왔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일본을 찾은 시라크는 자신이 스모를 좋아한다는 걸 내놓고 자랑할 만큼 일본 전통문화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고 관련 지식을 자랑해왔다. 그러니 사르코지가 굳이 도쿄, 교토가 뭐가 좋으냐며 스모를 아둔한 스포츠라고 비아냥댄 건 중국한테 호감을 사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시라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수준 낮은 시라크’라고 비꼬았다는 얘기다. 사르코지가 중·고교 시절 성적이 신통찮았고, 고급관료 양성기관인 프랑스국립행정학원(ENA)도 들어가지 못해 그곳 출신 엘리트 관료 정치가들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 정계에서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명문 파리대학 출신에 변호사였다. 어머니가 테살로니카 출신의 그리스계 유대인이었으나, 조부대에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사르코지 자신도 가톨릭 교도다. 아버지는 헝가리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인데,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독일 쪽으로 빠져나가 프랑스 외인부대 용병이 됐다. 신보수주의자·신자유주의자·친미파라면 사르코지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건 파리 서쪽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1983년 28살 나이에 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다. 1993년 시내 유치원에 폭발물을 소지한 남자가 원아 21명을 붙잡고 현금 1억프랑(약 170억원)을 내놓으라며 인질극을 벌였다. 현장에 달려간 사르코지 시장은 인질범을 직접 만나 달변으로 어르고 달랜 끝에 원아들을 차례로 풀어주게 만들었다. 대폭발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질범과 협상하면서 원아들을 한 명씩 팔에 안고 나오는 그의 모습은 텔레비전으로 현장 중계되면서 전 국민을 열광케 했다. 그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그때 현장에 있던 기자는 말했다. “그는 현장을 기록하는 구급대 촬영반 카메라를 항상 의식했다. 무슨 일에서든 자신을 중심에 세우려 했다.” 내무장관 자리에 앉은 그가 폭력시위가 벌어진 이민자 지구 등 치안불안 지역을 겁없이 시찰하고 시위자들을 “사회 쓰레기”니 “깡패”라 불러 물의를 빚으면서 ‘터프가이’, 과감한 실행가의 이미지에 집착한 것도 그 연장이었다. 그는 또한 부자다. 당선 그 다음날 전세낸 제트기로 가족과 함께 지중해로 날아가 부호 소유의 호화 요트를 빌려 바캉스를 즐겼다. 어머니가 변호사였고, 형은 섬유회사 사장으로 프랑스의 전경련(MEDEF) 부회장을 지냈다. 이 부자에다 용맹과감한 친미 신자유주의 실행가가 뭔가 삶을 바꿔줄 것이라고 다수의 프랑스 유권자가 기대한 모양이다. 우파 사르코지의 당선은 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는 좌파의 무능, 좌파의 몰락 덕이라는 분석이 많다. 프랑수아 미테랑 이래 좌파는 사회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전과 실행력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해체되고 조락한 옛 중산층이, 먼 장래의 지당하신 얘기만 하는 모호한 좌파보다는 차라리 당장 뭔가를 바꿔보겠다는 우파 실행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보수주의자에 신자유주의자, 친미파라면 “일 더 많이 해서 돈 더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들 그건 중산층과는 무관한 얘기다. 무관한 정도가 아니라 그거야말로 사회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의 주역 아닌가.
[%%IMAGE5%%] 발빠른 일본 언론들이 사르코지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2004년 1월에 홍콩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단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보단 중국이 좋다. 홍콩은 매혹적인 도시지만, 도쿄는 숨이 막힌다. 교토의 황궁(메이지 2년에 도쿄 쪽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천황 거소)은 초라하다. 유명한 정원도 음침했다.” “포마드를 바른 뚱뚱한 남자들끼리 싸우는 게 뭐가 그리 매력적이라는 건가. (스모는) 지적인 스포츠는 아니다.” 사르코지는 나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지만,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 아소 다로 외상이 그냥 있을 리 없다. “프랑스 쪽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신경쓸 것 뭐 있나. 최근까지도 프랑스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대해) ‘날생선을 그냥 먹다니’ 하고 흉보지 않았나.” 그렇다고 사르코지가 반일주의자란 건 아니다. 그는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 찬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시해왔다. 문제는 시라크가 일본을 무척 좋아하고 대일관계에 상당히 신경써왔다는 점이다. 여러 차례 일본을 찾은 시라크는 자신이 스모를 좋아한다는 걸 내놓고 자랑할 만큼 일본 전통문화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고 관련 지식을 자랑해왔다. 그러니 사르코지가 굳이 도쿄, 교토가 뭐가 좋으냐며 스모를 아둔한 스포츠라고 비아냥댄 건 중국한테 호감을 사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시라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수준 낮은 시라크’라고 비꼬았다는 얘기다. 사르코지가 중·고교 시절 성적이 신통찮았고, 고급관료 양성기관인 프랑스국립행정학원(ENA)도 들어가지 못해 그곳 출신 엘리트 관료 정치가들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 정계에서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명문 파리대학 출신에 변호사였다. 어머니가 테살로니카 출신의 그리스계 유대인이었으나, 조부대에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사르코지 자신도 가톨릭 교도다. 아버지는 헝가리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인데,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독일 쪽으로 빠져나가 프랑스 외인부대 용병이 됐다. 신보수주의자·신자유주의자·친미파라면 사르코지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건 파리 서쪽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1983년 28살 나이에 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다. 1993년 시내 유치원에 폭발물을 소지한 남자가 원아 21명을 붙잡고 현금 1억프랑(약 170억원)을 내놓으라며 인질극을 벌였다. 현장에 달려간 사르코지 시장은 인질범을 직접 만나 달변으로 어르고 달랜 끝에 원아들을 차례로 풀어주게 만들었다. 대폭발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질범과 협상하면서 원아들을 한 명씩 팔에 안고 나오는 그의 모습은 텔레비전으로 현장 중계되면서 전 국민을 열광케 했다. 그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그때 현장에 있던 기자는 말했다. “그는 현장을 기록하는 구급대 촬영반 카메라를 항상 의식했다. 무슨 일에서든 자신을 중심에 세우려 했다.” 내무장관 자리에 앉은 그가 폭력시위가 벌어진 이민자 지구 등 치안불안 지역을 겁없이 시찰하고 시위자들을 “사회 쓰레기”니 “깡패”라 불러 물의를 빚으면서 ‘터프가이’, 과감한 실행가의 이미지에 집착한 것도 그 연장이었다. 그는 또한 부자다. 당선 그 다음날 전세낸 제트기로 가족과 함께 지중해로 날아가 부호 소유의 호화 요트를 빌려 바캉스를 즐겼다. 어머니가 변호사였고, 형은 섬유회사 사장으로 프랑스의 전경련(MEDEF) 부회장을 지냈다. 이 부자에다 용맹과감한 친미 신자유주의 실행가가 뭔가 삶을 바꿔줄 것이라고 다수의 프랑스 유권자가 기대한 모양이다. 우파 사르코지의 당선은 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는 좌파의 무능, 좌파의 몰락 덕이라는 분석이 많다. 프랑수아 미테랑 이래 좌파는 사회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전과 실행력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해체되고 조락한 옛 중산층이, 먼 장래의 지당하신 얘기만 하는 모호한 좌파보다는 차라리 당장 뭔가를 바꿔보겠다는 우파 실행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보수주의자에 신자유주의자, 친미파라면 “일 더 많이 해서 돈 더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들 그건 중산층과는 무관한 얘기다. 무관한 정도가 아니라 그거야말로 사회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의 주역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