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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때 그 ‘영광’이 몇 걸음이나 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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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5 00:00 수정 : 2010-02-0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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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분열적인 과거 회귀·퇴행을 보이는 일본 극우의 행각을 보며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아베 신조 총리와 아소 다로 외상, 나카가와 쇼이치 자민당 정조회장, 그리고 시오자키 야스히사 관방장관과 시모무라 하쿠분 관방부장관, 나카야마 나리아키 전 문부과학상, 그리고 <요미우리신문>과 <산케이신문>…. 일본 조야가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를 재료 삼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끝없이 펼치고 있는 극우 행각이 갈수록 현란하다. 아무래도 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

‘고노 담화’의 주인공 고노 요헤이 전 일본 외상은 아베 총리 정부의 위안부 부인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에 참석한 고노 전 외상(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 사진공동취재단)


모든 ‘변란’의 출발점은 냉전 해체

아베 등이 기를 쓰고 부인하려는 ‘고노 담화’의 주역 고노 요헤이는 군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확인해줄 자료가 없다고 한 아베 등을 두고, “그러니까 군위안부 자체가 없었다고 고집하는 건 지적으로 성실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지난 3월27일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고노는 지난해 말 인터뷰에서 16명의 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일본 당국의 강제 모집 직접 개입의 증거로 간주하면서 “누가 무슨 얘길 해도 문제 없다”고 했다. 자기가 옳았다는 재확인이다. 그는 군위안부 모집 명령에 관한 일본군 자료들이 “(일본군에 의해) 처분됐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정도는 누구라도 알 만하다. 아베 등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고 싶을 뿐이다.

이런 지적 불성실자 중에서도 골수인 아소 외상이 자유주의자 고노의 파벌 후계자라는 건 얄궂다. 이케다 하야토, 오히라 마사요시, 미야자와 기이치로 내려온 자민당 내 보수 본류 명분 파벌 ‘굉지회’의 차기 영수 자리를 놓고 1998년 가토 고이치와 일전을 벌인 끝에 패한 고노는 조직을 이탈해 자신의 파벌 ‘대용회’를 결성했다.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에 이어 아소가 2위를 차지하자 고노는 아소에게 대용회를 물려주었고, 아소는 ‘위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쇼와 시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와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들인 아베와 아소의 도전은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냉전체제 붕괴와 ‘넘버원 국가 일본’ 신화의 붕괴, 장기 불황의 시작이라는 시대변화, 그들이 ‘제2의 흑선(1853년 페리 제독이 몰고 온 군함) 도래’로 받아들인 그런 충격에 대한 대응 방향은 퇴행과 과거 회귀의 전형이었다.

1991년 12월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물러남으로써 소련이 소멸했다. 92년 1월13일 미야자와 일본 총리 방한을 앞두고 벌어진 ‘정신대 피해보상 요구 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통한의 과거를 공개 증언했다. 나흘 뒤인 17일 서울에 온 미야자와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군위안부 문제로 사죄했다. 93년 6월6일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으로 중의원이 해산했고, 7월18일 총선에서 자민당 의석이 과반수 아래로 내려갔다. 전후 38년간 자민당 일당의 장기 집권을 보장했던 ‘55년 체제’가 이로써 무너졌다. 8월4일 일본 정부가 군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닷새 뒤인 9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비자민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10월에 난징 대학살과 군위안부 등 부녀 폭행과 관련한 교과서 기술에 대해 정부가 검정 과정에 개입해 내용을 고치도록 한 것은 위법이라며 제소한 이에나가 사부로 도쿄대 교수가 재판에서 승소했다. 11월5일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다.

이 모든 ‘변란’의 출발점은 냉전 해체였다. 냉전은 전후 일본 경제 기적의 토대였던 미국의 안보우산과 아시아판 마셜플랜을 가능케 한 마법의 상자였으며, 자민당은 거기에 기생한 꽃이었다. 냉전의 붕괴는 그 메커니즘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것은 곧 자민당의 붕괴를 예고했다. 군위안부 문제의 부각은 그 불길한 전조였다. 전후 처음으로 정권마저 내준 자민당 주류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정권 정도가 아니라 전후에 쌓아올린 모든 기득권을 다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저지해야 했다.

만능열쇠, 재무장을 위한 개헌

고노 담화가 발표된 1993년 8월 자민당 내 우파들이 ‘역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지칭하며 ‘새로운 교과서 만들기 투쟁 국민운동’을 제창했다. 94년부터 ‘자유주의사관연구회’가 결성되고 자민당 내에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 ‘일본의 앞길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 만들어졌고,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도 등장했다. 아베와 아소는 그 중심에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총리가 되고 외상이 되고 파벌 영수가 됐다.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이란 멀어져가는 냉전을 붙들어 다시 앉히는 한편으로, 더 이상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워진 냉전 귀신과 미국의 대체물을 찾는 일이었다. 미국은 지금 이 점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거대중국의 등장이 일본 우익들의 초조감을 배가했다.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북한을 위험한 깡패국가로 몬다. 중국을 겨냥해 테러와의 전쟁과 미사일방어(MD) 구상 추진에 적극 가담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세대가 이룩한 ‘대동아공영권’, 미국 없는 동아시아 패권의 부활을 꿈꾼다. 조선 및 중국 몰락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메이지 이래 근대일본의 성공신화에 대한 집착이다. 아베가 공약한 ‘아름다운 나라’ 일본의 실체다. 그 꿈을 이룰 만능열쇠가 재무장을 위한 개헌이다.

심히 분열적인 과거 회귀요, 퇴행이다. 그렇게 해선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그때 그 ‘영광’이 몇 걸음이나 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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