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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꾼다고 해도 바뀌는 게 없잖아?” 세상은 ‘요지부동’ 속이다

탈출구 보이지 않는 폐색감이 공통감각이 된 청년들, 어떻게 서로를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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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3-05-11 21:43 수정 : 2023-05-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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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린다>에서 수진은 눈을 감고 뜨는 것을 반복한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뜨더라도 자기 앞의 풍경이 바뀌는 것 하나 없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 연출 전공인 주현은 폐쇄감을 그렇게 표현했다.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말하라면 ‘폐색감’이라고 할 수 있다. 폐색감은 일본에서 쓰던 말이다.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시작된 ‘잃어버린 30년’의 기간에 일본인이 일본 사회와 자기 삶에 대해 느끼던 감각을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의 특징은 ‘사회’에 대한 것과 자기 ‘삶’에 대한 것을 동시에 느끼는 감각이자 표현이라는 점에 있다. 사회학적이자 동시에 심리학적인 말이다.

폐색감의 핵심은 앞뒤가 꽉 막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가 가망이 없으면 개인이라도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각자도생이라도 가능해야 한다. 사람들이 각자도생이라도 하면 사회는 비록 약육강식과 외면의 아비규환이 되겠지만 활력은 넘칠 수 있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이 무력감에 각자도생마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사회는 깊은 침묵에 빠져든다. 망해가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서 사회가 평온하게 서서히 침몰한다.

‘공통의 감각’이지만 공감되지 않는

여기에 이런 답답함에 대해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호소해서도 안 된다는 금지가 하나 더 붙는다.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폐색감을 호소하며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일본이야 워낙 민폐에 대해 금지 명령이 강한 사회로 잘 알려졌지만, 한국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 경향이 빠르게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지만 말이다. 민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양극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러다보니 동시대의 공통감각인 폐색감은 모순되게도 ‘공통의 감각’으로 감각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느끼지만, 그것을 토로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왜 이런 상태인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그 자체가 ‘민폐’로 인지된다. “너 혼자만 힘든 것 아냐, 징징거리지 마”라는 말이 각자가 동시대에 느끼는 것을 동시대에 대한 ‘공통의 감각’으로 확장하는 길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

콜센터 직원들의 반인권적인 감정노동과 그에 따른 파국적 상황을 고발하는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젊은 세대가 느끼는 이 폐색감에 대한 연극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콜센터에서 감정노동자로 일하는 여자주인공 수진과 연극후보생인 남자주인공 민규는 둘이 담배를 피우며 처음 만난 고시원 옥상에서 만난다. 늘 실적이 낮아 야단맞던 수진은 민규의 도움으로 모처럼 콜센터에서 좋은 실적을 내고 칭찬받지만 하필 그 순간에 콜센터에서 가장 우수한 사원이던 동료 지은이 전화폭력에 시달리던 끝에 회사로부터 버림받고 자살한다. 그리고 수진의 ‘웃음’을 도와주던 민규 역시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둘은 사회에도 길이 없고 자신들의 삶에도 길이 없는 상태가 되어 옥상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할 건데요?”라고.

둘은 각자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간파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돌파되지 않음을 말이다. 수진이 민규에게서 억지로 웃고 연극하며 고객을 응대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으로 처음 좋은 실적을 냈지만 그 실적이 어떻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사람을 파괴하는지 지은의 자살이 극적으로 보여준다. 수진에게 억지웃음을 가르쳐 좋은 실적을 내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민규는 오디션이 끝났는데도 자기 말의 90%가 여전히 오이디푸스의 대사(민규가 오디션을 보는 연극의 대사)인 것에 괴로워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돌파되지도 않고 존재하려는 노력 자체가 삶을 갉아먹는다.

‘좋빠가!’도 자본 있는 사람들의 말

학생들에게 이 두 주인공의 현실은 곧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극하는 학생들이다보니 연극배우 지망생인 민규의 이야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콜센터 직원인 수진의 이야기 역시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학생 대다수는 학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에서 알바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속칭 ‘노가다’를 뛰기도 하고 밤마다 대리운전으로 학업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들이 돈 벌기 위해 하는 일 대부분이 육체노동이자 동시에 감정노동이다.

그래 봤자 자신들에게 미래는 아주 희미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민폐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지만, 언제까지 연극이 좋다는 것 하나만으로 버티지 못함을 잘 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설 곳도 별로 없다.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도 자본이 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대다수는 가던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망한 회사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한 친구는 망해가는 회사에 왜 직원들이 계속 출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친구는 그들이 나오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냐고 되물었다.) 물론 희미한 전망과 현재의 기쁨을 갖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생들은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이 앞뒤 꽉 막힌 막막함과 ‘어쩔 수 없음’으로서의 폐색감을 ‘요지부동’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학생들이 느끼기에 한국 사회는 요지부동의 사회다. 아무리 위기라고 이야기하고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해도 절대 움직이거나 바꾸지 않는다. 설령 뭔가를 바꿔도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바꾼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게 없잖아요?”라는 말이다.

이런 요지부동 사회에서 사람들 역시 요지부동이다. 그게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요지부동 사회에서 사람들은 뭔가 바뀌는 게 있으리라 믿고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자기만 손해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변한다는 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국가를 필두로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절대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살던 대로 살아야 그나마 본전은 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저출생에 대해 정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학생 들은 단언했다. 이미 국가의 말은 믿음을 잃어 사람들 마음이 요지부동이라는 것이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 포스터.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목 조른다

이 폐색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같이 공부하는 연출 전공의 주현은 “무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출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느끼는 폐색감을 작품에 이렇게 비유했다. 작품에서 민규와 수진은 서로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은 뒤 눈을 가린 안대를 벗는다. 그리고 수진은 눈을 감고 뜨는 것을 반복한다. 주현은 이 대목에서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뜨더라도 자기 앞의 풍경이 바뀌는 것 하나 없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폐색감이 아니겠냐고 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들이 경험하는 하루하루의 세상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력하게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밖에 없다. 이 현실이 자신들의 목을 조르며 숨 막히게 한다.

주현의 이야기는 폐색감의 실체가 무엇이고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원적 좌절인지를 알려준다. 인간의 삶에 희망이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새로운 탄생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진우,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이다. 폐색감은 인간 존재의 근원인 이 능력을 뿌리부터 제거해버린다. 따라서 “일상적 삶은 아무런 새로움 없이 냉혹하게 반복된다”.(같은 책) 주현은 그런 반복을 눈을 감고 뜨는 일로 표현했다.

지금껏 폐색감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주현이 말한 것보다 더 생생하게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같이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 역시 그 말에 감탄했다. 그것이 모두가 경험하는 동시대의 감각으로서 폐색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와 공유할 수 없는 감각이 폐색감인데 주현의 표현/이야기와 더불어 수업을 듣는 학생 대다수에게 공통감각으로 공유됐다. 그 순간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폐색감을 넘어설 수 있다. 공유할 수 없음, 그것을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에 대한 공통감각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지금 우리 교실이 공유한 그 감각이 고시원 옥상에 있는 수진과 민규에게도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지 물었다. 학생들은 그렇다고 말했다. 폐색감이 모든 존재를 각자에게 유폐해버리지만, 인간은 그 폐색감을 공통감각으로 만들어 ‘각자’라는 감옥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폐색감이 동시대를 인식하는 시작점의 감각이 된다. 지난 학기에 이 연극(<전화벨이 울린다>)을 한 번 연출했고 이번 학기에 다시 도전하는 준구는 이 옥상을 ‘만남의 공간’ ‘탄생의 공간’으로 그리려 했다.

이야기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므로

말한다는 것. 쓸모없더라도 말/이야기를 한다는 것의 힘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람을 각자의 감옥에서 끄집어내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한다. 폐색감에 젖어 서로를 만날 수 없는 게 이 시대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것이 공통의 운명임을 깨닫게 되면 사람은 폐색감을 넘어 다른 사람을 같은 운명의 공유자로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이야기의 힘은 ‘초월’에 있다. 민규와 수진이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옥상에서 만나고, 옥상에서 만나는 민규와 수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가 관객과 만나 동시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폐색감을 초월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폐색감을 초월해 만나는 두 사람, 만난 두 사람을 둘러싼 사회는 여전히 ‘폐색 사회’다. 이야기가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연출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이는 만남에 대한 낭만화이자 동시대에 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폐색감이라는 동시대적 감각을 초월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폐색 사회’라는 동시대성을 감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대에는 세 가지가 올라와야 한다. 폐색감. 폐색감을 초월한 만남. 그 만남을 단단히 감싼 폐색 ‘사회’.

이야기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이야기의 힘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야기의 역할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까지다. 이야기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힘에 의지해 이야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사회야말로 “세계를 뒤흔드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사회다. 새로운 것이 탄생해야 하는 곳은 요지부동하는 “현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 그것을 정치라고 불렀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전화벨이 울린다> 출연진과 제작진.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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