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구 중1동 해운대 해변에 만들어진 모래 조형물.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산책로라며?”해안 절벽을 따라 숲길을 1시간30분 동안 앞서 걷던 동행자가 투덜댔다. 오래전 지리산에서 내려오다 무릎을 다친 그는 등산을 못한다. 오솔길과 데크로 이어진 숲은 험하지 않았지만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다보니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2007년 제주 올레길이 처음 생겼을 때 나는 한 달간 제주도를 주말마다 들락거렸다. 해안을 따라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게 즐거웠고, 그 길 끝에서 만난 게스트하우스에서 잠드는 게 행복했다. 일터에서 부풀어 오른 고민으로 불면증에 시달릴 때라 그 길이 더없이 소중했다. 잠 못 드는 날이 다시 많아진 요즘, 길이 그리워졌다. 2020년 1월 발목 인대가 파열된 뒤 걷기를 멈춘 지 1년, 다시 걷기여행에 나섰다. 영화 관련 조형물과 벽화가 800m 해변길에 펼쳐지는 영화의 거리.
소리를 질러야 대화가 되는
해파랑길 1코스는 올레길 이후 생겨난 걷기 여행길(걷기여행 사이트 ‘두루누비’ 소개 555개) 중에서 자연과 도심 풍경이 어우러진 특색 있는 곳이라 평가받는다. 시작점은 동해와 남해의 경계를 가르는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이고, 이기대공원과 광안리 해변, 영화의 거리, 해운대 해변으로 약 17.8㎞ 이어진다. 2016년 개통한 해파랑길 50개 코스(10개 지역, 750㎞) 가운데 경북 영덕 블루로드와 함께 큰 인기를 누린다. 4월25일 오전 11시께 도착한 오륙도 선착장에는 강풍(풍속 초당 8m)이 몰아쳤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유채꽃이 만발했다는 오륙도 스카이워크를 들르지 않고 해파랑길 안내소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해맞이공원 언덕에 올라오니 바람이 유순해졌다. 부산의 상징 오륙도도 한눈에 들어왔다. 오륙도는 부산 남구 용호동 앞바다의 거센 물결 속에 솟아 있는 6개 바위섬을 말한다. 밀물 때는 2개 섬(방패섬·솔섬)이 하나로 합쳐져 5개 섬이 된다고 해서 오륙도라는 이름이 붙었다.2021년 새로 단장한 이기대공원은 데크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기대란 두 기생의 무덤이라는 뜻인데, 이들이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꽃과 나무로 뒤덮인 숲이 해안 절벽을 따라 펼쳐지는데 그 속에서도 파도 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철썩였다. 한 명 정도만 빠져나갈 수 있는 숲길에서 동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소리를 질러야 할 지경. 화창한 봄날의 휴일이라 오가는 여행자도 많아 자연스레 홀로 걸으며 바닷가 풍경에 집중했다. 바다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밀당하는 아름다운 해안 절벽을 따라 농바위, 밭골새, 치마바위, 어울마당, 구름다리를 지나고 이기대공원을 빠져나오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쳤던 발목을 중간중간 스트레칭했더니 4.8㎞를 3시간이나 걸었다. 광안리 해변으로 향하는 길(4㎞)은 차도, 자전거길과 나란했다. 걷기에 지쳤다면 자전거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군데군데 자전거 대여소와 카카오자전거가 보였다. 해파랑길 1코스의 중간 지점인 광안리 해변에 4시간 만에 도착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부산 요트경기장, 아펙(APEC)하우스(누리마루), 해운대 해변까지 나머지 9㎞를 내달릴 것인가, 아니면 하루 묵고 다음날을 기약할 것인가. 무릎이 아픈 동행자와 발목이 걱정스러운 나는 쉬기로 했다. 해파랑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2016년 개통한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10개 지역, 50개 코스)를 잇는 750㎞의 동해안 걷기 여행길이다.
등산은 이기대공원으로 충분했으니…
나머지 해파랑길 1코스는 해운대 해변에서 출발해 반대로 걸었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자서 몸이 가뿐했다. 반원을 그리며 뻗어 있는 해안선에 놓인 모래 조형물을 지나 부산 웨스틴조선호텔과 아펙하우스를 둘러싼 산책로로 향했다. 서울 남산 둘레길인가 싶을 정도로 잘 정돈된 달맞이길을 따라가다보면 소나무와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동백섬이 나온다. 섬을 가로지르는 산책길 앞에서 망설였다. “이기대공원 탐방로의 축소판”이라는 김선식 기자의 설명(<한겨레> 2021년 2월26일치 ‘부산, 여름 말고 봄! 해파랑길 1코스 걷기’ 참조)을 떠올리며 뒤돌아섰다. 등산은 이기대공원으로 충분했다. 출발한 지 1시간30분 정도 지났을 때 낯익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릴 때 방문했던 해운대 영화의 거리(해안 800m). 아기자기한 영화 관련 조형물과 벽화가 초고층 아파트, 호텔, 리조트와 대조를 이룬다. 부산요트경기장, 민락교를 지나면 1㎞ 데크가 놓인 분주한 해안길이 나타난다. 여행자와 동네 주민이 엉켜 걷고 뛰는 곳인데다 일부 구간은 공사 중이다. 어느덧 광안리 해변, 이틀간 7시간을 걸어 바다와 숲, 도시가 어우러진 해파랑길 1코스를 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