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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항상 아픈 애’로 보인 뒤 연봉 인상에 실패하다

사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세상은 무너진다, 정지현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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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12-13 20:03 수정 : 2020-12-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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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최지영

양극성장애(조울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하미나 작가는 지난 4년 간 한국 여성의 정신질환을 화두로 삼아 연구해왔다. 대학원에서 정신의학 역사를 공부하고 우울증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이삼십 대 여자들의 우울증 이야기를 듣고 다니며 기록도 했다. 병원에서도 학계에서도 이들이 겪은 우울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의 일부를 공개한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정지현과는 2019년 10월 처음 만났다. 지현은 다섯 명의 인터뷰이 중 유일하게 먼저 인터뷰를 요청한 사람이었다.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만나 처음 병원에 가게 된 날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지현은 늘 아픈 사람이었다. 잠을 못 자고 체중이 줄고 얼굴에 마비가 오기도 했다. 남자친구와 좋지 않은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점심시간을 앞두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괜찮은 척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팀장에게 ‘속이 안 좋아 밥을 따로 먹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열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길로 놀라 뛰어나와 울면서 병원에 갔다.

‘항상 아픈 애’로 보인 뒤 연봉 인상에 실패하다
2014년 12월30일.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새해 1월2일이었다.

“일어나니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와 있는 거예요. 전 남자친구한테도 연락이 안 왔어요.”

무슨 독한 약을 먹었길래 이러나, 약이 무서웠다. 누구한테도 얘기할 길이 없어 생명의전화에 전화해 울었다. 걱정을 털어놓으니 담당 의사는 “약을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안 먹어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지현을 달랬다.

지현은 “젊은 여성의 스물다섯, 스물여섯 정도, 그러니까 사회 초년생 때가 좌절의 시작,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지현은 5~6살 때부터 아프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려움이 시작됐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잖아요.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최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몸이 아파요. 몸 아픈 애로 회사를 한 번 다녔더니 망했어요.” 회사에서 ‘항상 아픈 애’로 보인 뒤 혼자만 연봉 인상에 실패했다. 조직에 도움이 안 된다느니 하는 뒷얘기도 돌았다.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존재로 사회에 있어야 하나, 상처를 받았다.

지현은 자신의 우울증이 “애정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부모한테도, 남자친구한테도, 회사 동료들한테도 더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바랐다. “한국 사회가 20~30대 사회초년생 여성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요. 너를 딸처럼 생각해서, 예뻐서 이건 성희롱이고요. 원가족에선 빨리 결혼해서 나가라고 하죠. 회사는 결혼·임신·출산 같은 위험요인이 있다고 생각하니 여직원은 남직원보다 안 키우죠. 여자 선배들도 마찬가지예요.”

청소년 때는 성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지만 그 뒤에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 사회생활을 하니 월급부터가 차별이다. “가족에게도, 회사 사람들에게도, 애인에게도 감정노동을 하고 많은 에너지를 쏟잖아요. 그게 보상이 안 되잖아요. 보상할 계획도 없어 보이고, 그게 또 너무 잘 보이고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제가 특별히 더 예민하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아플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유서를 써서 보내자 ‘빛의 속도’로 달려온 사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여성의 우울은 심화된다.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 김새롬 연구활동가(예방의학 전문의)는 20~30대 여성은 ‘추락하기 쉬운 세대’라고 봤다. “한국은 여성의 변화가 급격했다. 가족 모델도 무너지고, 연애 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20~30대 여성은 어느 세대보다 교육받고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넓다. 그래서 추락하기 가장 쉽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여권이 커지는 가운데 젠더 폭력이 심해지면서 여성들이 아노미(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에 빠지는 경험을 공유한다.”

지현이 우울할 때 가족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건 “엉뚱한 리액션”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현의 상황을 알고 있던 건 남자친구다. 지현은 경제력 없던 그를 1년간 보조했다. 그와의 관계는 악화되고 법정 다툼까지 갔다. 어느 날 유서를 써서 남자친구에게 보냈다. “내가 빌려준 돈은 내 가족에게 돌려줘. 남은 나의 유산 일부는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해줘. 안녕.”

그 순간 지현 집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남자친구도 경찰도 아닌, 남자친구의 엄마였다. 그의 엄마는 “빛의 속도”로 달려와 무단침입하고 지현을 폭행했다. “남자친구가 무서우니까 엄마한테 가서 말한 거예요. 그때 제 안에 잠자던 가부장제를 향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갑자기 정신이 들었어요.”

“저조차 우울의 근원을 가족이나 남자친구로 두지만, 얼기설기 조합해보면 어떤 한 명이 가해자가 아니에요.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아니거든요. 나를 우울하게끔 했던 이놈의 대한민국, 이놈의 사회.”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나. 지현의 남자친구나 그의 엄마나 지현의 가족이나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20~30대 여성은 똑똑하다. 내게 문제가 있다는 촉이 예민하고, 병원에 찾아가고, 심리상담을 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치료를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건 맞으니까.

정여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역시 ‘우울’을 병리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인사이트(통찰)가 생겼기 때문에 우울할 수도 있어요. 인사이트가 생겨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거든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이 고통은 어쩌면 전체 삶의 궤적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일지도 몰라요.”

왜 손이 두 개겠어요?
지현은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풍부하게 나왔으면 좋겠다. 개인의 우울로 서사화되는 것이 불편하다. “어떻게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될지 스스로 조절하는 걸 자립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나 남자친구에게 의지해보고 회사에도 의지해보지만, 결국 다 소용없구나. 내 주관대로 살아가야지 하고 가장 먼저 깨치는 사람이 20~30대 여성인 것 같아요.”

지현은 웃으며 자신의 양쪽 손을 맞잡았다. “왜 손이 두 개겠어요. 오른손 왼손 이렇게 잡으라고.”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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