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의사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끊임없이 병명을 찾아서, 이다울의 경우

1342
등록 : 2020-12-13 19:07 수정 : 2020-12-16 19:08

크게 작게

일러스트레이션 이다울

양극성장애(조울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하미나 작가는 지난 4년 간 한국 여성의 정신질환을 화두로 삼아 연구해왔다. 대학원에서 정신의학 역사를 공부하고 우울증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이삼십 대 여자들의 우울증 이야기를 듣고 다니며 기록도 했다. 병원에서도 학계에서도 이들이 겪은 우울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의 일부를 공개한다.
2014년 대학교 2학년이던 이다울에게는 갑작스럽게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은 척추부터 시작해 뒤통수를 지나 얼굴까지 번졌다. 머리와 어깨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피로감이 쏟아져 책상 앞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휴학했는데 통증이 계속돼 지금까지도 복학하지 못했다.

“온갖 병원을 탐방하며 각종 질병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동시에 부지런히 진료비 영수증을 보험사에 제출했다. 하루빨리 명확한 병명을 알고 싶었지만 실패만 거듭할 뿐이었다. …나는 병명을 갈망하는 동시에 질병에 속박당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떤 병명으로 인해 세상이 나를 배제하고 외롭게 만들까봐 초조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급박한 것은 고통스러운 통증을 조금이라도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답이 없을지도 모를, 병명 찾기는 계속되었다.”(<천장의 무늬>)

1년 만에 얻은 진단명
병명을 알기 위해 정형외과, 신경외과, 가정의학과, 한의원, 류머티즘 내과를 전전한 지 1년6개월 만에 그럴싸한 진단명을 얻는다. 섬유근육통. 특별한 원인 없이 신체 여러 부위에 통증이 계속되는 이 질환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발생 비율이 9배 높다. 진통제와 함께 항우울제가 치료에 쓰인다.

다울은 2017년부터 신경정신과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정신과 약은 효과가 있었다. 우리가 만난 2019년 10월 다울은 치아가 무척 상해 있었다. 이를 너무 꽉 깨무는 습관 때문에 신경이 손상돼 치료받는 중이라 했다. “신체 증상과 우울증이 분명히 주고받는 점이 있어요. 발작성 빈맥도 있고, 갱년기 사람처럼 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를 초마다 반복하기도 하고, 몸이 움찔거리기도 하고. 이유를 제대로 알 수도 없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니까 더 불안하고 우울해지고요. 그러다보면 통증도 더 심해져요.”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신체질환으로 정신질환이 나타나기도 하고, 정신질환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애초에 이런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헷갈려요. 이 헷갈림 때문에 자기검열과 불안이 더 커지고요.”

다울이 진단받은 섬유근육통의 경우 첫 증상을 경험한 뒤 진단받기까지 평균 2.3년이 걸리며 3.7명의 의사를 거친다. 이 질환의 환자 84%는 여성이다(Ernest Choy et al., 2010). 다발성경화증, 과민성대장증후군, 측두하악장애 등도 여성에게 흔하며 정확한 진단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질환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신체질환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해 여성 환자가 우울증을 겪게 된다는 지적도 있다(Bonnie J. Floyd, 1997).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1.5~2배 흔한 우울증처럼, 이 질환들이 여성에게 흔한 이유가 무엇이고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어렵사리 진단받더라도 완치가 어렵다.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신적 고통은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도 있다. 정확한 진단명을 얻지 못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다울은 우울과 불안이 증폭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에 찾아갔다. 사실 누구라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만성 신체질환을 겪으면 우울하지 않기 힘들 것이다.

우울을 질병의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만 보면 고통의 출발점이 된 질병을 찾아내고 연구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섬유근육통, 다발성경화증 등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질병의 진단이 늦어지는 이유기도 하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여성 환자의 30~50%는 오진이라는 주장도 있다(Bonnie J. Floyd, 1997). 정확한 진단이 늦어질수록 다음번 병원에 방문할 때 환자는 더 병들어 있게 된다.

만성 신체질환이 동반되는 우울증
정여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공황이나 신체화장애(정신적 문제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장애)가 의심된다고 해서 온 환자의 임상이 병의 증상과 달라서 내과나 신경과로 돌려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며 특히 “여성과 노인의 경우 임상의들이 신체가 아닌 정신의 문제로 좀더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국 여성의 우울증에는 자주 만성 신체질환이 동반된다(2014년 질병관리본부 ‘한국 여성의 우울증과 만성통증에 대한 심층분석’ 보고서). 문제는 이렇게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자주 경멸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고통을 인정받지 못하고 ‘병자 역할’로 이득을 얻으려는 존재, ‘닥터 쇼핑’하는 여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정신의학 교과서인 <최신정신의학>(제6판)은 (신체화장애) 환자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체 노출이 심하고 유혹적이며 이기적이고 의존적인 점 등 히스테리성 성격의 특성을 많이 보인다. 이들은 의존적이며, 이기적이고, 숭배받기 원하는 것처럼 보이고,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대인관계 장애도 심하다.”(422~423쪽)

다울은 진단명을 알기 위해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의사한테 자주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느냐, 더 기다려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안 낫는 거다. 이런 경험이 너무 많으니까 의사에게 말하기 어려운 거예요. 의사에게 내가 한 달 동안 겪은 일을 압축해서 2분 만에 말해야 하잖아요. 이게 되게 어려우면서 무서웠어요. 잘못 전달되면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약에 반영될 수도 있으니까요. 약마다 부작용이 정말 많은데….” 마야 뒤센베리는 책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에서 “여성과 사회적 빈곤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더 많이 보인다면 이는 아마도 의학이 이들 계층의 증상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질환”에서 “의사가 이렇게 보는구나”로
여성 인터뷰이들은 병원을 바꿀 때마다 진단명과 처방약, 복용량이 달라지는 일을 경험했다.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 다녀도 어떤 곳은 우울증으로, 또 다른 곳에선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공황장애로 진단했다. 때로는 성격장애로 진단했다.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거점) 부소장은 “정신과에선 증상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치료가 이뤄지기 때문에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의사마다 진단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이들은 ‘나에게 이런 질환이 있구나’에서 ‘이 의사는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로 생각을 바꿔간다. 의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약을 처방받는 통로로 생각하기도 한다. 장 부소장은 이런 고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신과는 아무래도 의사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기 때문에 쇼핑을 좀 다녀도 된다고 생각해요. (웃음) 걱정된다면 약 처방을 받지 말고 상담이라도 받아보세요. Z진단(상담 진단)으로 해달라고 하면 정신과 기록도 남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정신과를 다녀서 좋아진 경우 숨기기보다는 많이 이야기해야 정신과 문턱이 좀더 낮아질 수 있겠지요.”

하미나 작가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