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다울
양극성장애(조울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하미나 작가는 지난 4년 간 한국 여성의 정신질환을 화두로 삼아 연구해왔다. 대학원에서 정신의학 역사를 공부하고 우울증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이삼십 대 여자들의 우울증 이야기를 듣고 다니며 기록도 했다. 병원에서도 학계에서도 이들이 겪은 우울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의 일부를 공개한다.
서울에 사는 30대 여성 디자이너 박지은과는 그의 집에서 자주 만났다. 갈 때마다 지은은 내게 차와 과일을 살뜰하게 챙겨줬다. “우울증이 언제 시작됐는지 꼽기 힘든데… 요즘은 첫 남자친구를 꼽아요. 제일 심하게 와서.” 20대 초반에 만난 그는 7살 차이 나는 군인이었다. 그는 지은을 “키워서” 빨리 결혼하겠다고 했다. 지은은 그가 어른처럼 보였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듯해 좋았다. 사귄 지 100일쯤 됐을 때, 남자친구에게 4년간 만난 여자친구가 있음을 알았다. 문자가 와서다. “나 지금 어디 모텔에 있다. 전 여자친구랑 잘 거고 다시 사귈 거니까 너랑 끝이다.” 누군가랑 처음 사귀었는데 100일도 안 돼 헤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를 붙잡았다. 화내야 하는 일인 줄 몰랐어요
언젠가부터 그는 지은을 끊임없이 혼내고 비난했다. 전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비교했다. 그때부터 지은에게 잠자리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연애가 처음이던 지은에게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남자친구의 말은 그대로 기준이 되었다. “오빠는 왜 내 생일도 안 챙기고 나랑은 파스타 집에도 안 가고 김치찌개만 먹으려 그래.” 그는 지은이 너무 눈이 높고 습관이 잘못 들었기에 버릇을 고치는 것이라고 했다. 지은은 그때부터 남자친구가 원하는 ‘여자친구로서 센스’를 익히려 노력했다. 그와의 관계에 몰두하면서 학교도 자연스럽게 나가지 않게 됐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욕을 하기 시작했어요, 술 마시면 폭력성을 띠더니. 한 달에 네 번 정도를 헤어졌는데 그러면서 이상해졌던 것 같아요. 화가 나면 잠자리로 달래고. 계속 잠자리 위주였어요. 그 과정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스트레스랑 상처를 좀 줬나봐요?”지은은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지은은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잘못을 찾았고 남자친구를 동정했다. “싸우면 같이 싸우다가 울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저를 망가뜨리기 시작했어요.” 지은은 첫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그를 잊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계속 만났다. 그때마다 부정적인 경험이 반복됐다. 그만해야겠다 싶어서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한 날, 경찰이 지은을 잡아갔다. 지은을 다정하게 대해준 두 경찰 중 한 명에게서 다음날 연락이 왔다. 그와 만나 술을 마시고 잠자리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언니가 화가 나 보낸 문자에 경찰이 놀라, 폭우가 내리던 새벽 3시 주차장에 지은을 두고 갔다. 언니는 더욱 화를 냈다. 지은이 “내가 그렇게 했어, 그렇게 만들었어”라고 이야기해서였다.“제 눈에는 다 동아줄이에요. 이 남자가 아무리 병신 같아도 조금만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만 보려고 해요. 살아야 하니까. 이게 내 희망일 수도 있으니까.”지은은 다섯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산다. 고양이는 함께 살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지은이 다 떠맡았다.나쁜 사이클을 계속 도는 이유
지은뿐 아니라 다른 인터뷰이에게도 연인은 우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인은 인터뷰이들을 행복하게도 우울하게도 만들었다. 데이트폭력, 성폭력을 반복적으로 겪기도 했다. 이런 나쁜 사이클을 벗어나기 힘든 이유가 있다. “지금 당장 곁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한 이들은 돌봄을 제공해주리라고 기대되는 연인을 찾는다. 우울증 환자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고 정서적·신체적으로 꾸준히 곁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임민경 정신 건강 임상심리사)하기 때문이다. 중증 우울증 환자는 치료는커녕 먹는 것부터 씻는 것까지 일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원가족은 우울의 방파제 구실을 하기는커녕 더 심란하게 하고, 친구는 아플 때 부르기엔 어려운 대상이다. 지은의 우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뒤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라는 존재를 잘 몰라요. 저한테는 그냥 중년 남자였어요.”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왔다. 술 먹고 슬쩍 들어왔다 다시 나갔다. 올 때마다 엄마와 성관계하는 소리가 들렸다.아빠는 지은의 방문을 함부로 열었다. 문이 열리기 전 형광등이 쓱 울렸다. 형광등 소리가 미칠 것처럼 싫었다. 방에 들어온 아빠는 지은을 억지로 뽀뽀하며 껴안았다. “5분만 껴안고 있게 해주면 뭐 사줄게.” 아빠는 이런 말도 했다. “지은아, 너 몸매가 좋다.” 술집에 지은을 불러 옆에 앉은 여자를 소개하기도 했다. “얘 진짜 열심히 사는 애야”라며. 아빠는 때때로 가족에게 뭉텅이 돈을 가져다줬다. 집에 돈이 떨어질 때는 아빠가 예뻐하는 지은이 나서서 열심히 돈을 타냈다. 대들기도 했다. “옛날에는 정말 엄마를 지키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은에게 아빠는 성적인 존재, 혹은 돈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게 아빤가?” “성인기에 외상을 경험하면 이미 형성된 성격이 파괴된다. 아동기에 외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성격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어진다.”(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경험은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성인이 되어 원가족에서 ‘탈출’한 뒤에도 여자들은 지난 기억이 새겨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할머니가 된 모습을 상상해보다
7개월 뒤 다시 만난 지은은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처음으로 할머니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하고, 자신의 우울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고 한다. 첫 남자친구를 기억하는 방법도 조금 달라졌다. “사랑이 아니라 저에 대한 집착으로 그 사람을 만났던 것 같아요. 관계에서 성과를 내고 싶었고요. 어떻게 보면 헤어지는 게 실패잖아요.” 지은의 공간에 갈 때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주변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는 사람인지 알게 됐다. 대화할 때마다 우울에 관한 가장 빛나는 통찰을 들었다. “처음에 우울증이란 걸 알면 그 이름에 매몰되는 것 같아요. 우울증 증상에 저를 맞춰보게 되고요. 이제는 그런 거 다 없애버렸어요. 제 기분에 어떤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어요. 우울증도 길어지니까 끝이 없어요. 매번 새롭게 알아가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인생 전반을 다시 해석하고 또 다른 실마리를 찾게 돼요. 결국 제일 잘 알게 되는 건 나 자신이에요. 나란 사람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모두 그럴 것 같아요.”하미나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