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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무몸] 아홉 살 여자가 말했다 “여자애라서…”

차별당한 적 없다고 오랫동안 믿었을 만큼 차별은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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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11-21 22:25 수정 : 2020-11-2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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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개 몽덕이랑 산책하면 아이들이 말을 건다. 초등학교 2학년 두 소녀는 단짝이다. 이 아이들이 몽덕이 꼬리를 보곤 홀린 듯 공원까지 쫓아왔다. 개는 곁을 잘 안 줬다. 만지려고 하면 꽁무니를 뺐다. “얘 여자예요, 남자예요?” 암컷이라니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여자애라서 소심한가보다.” 2020년 9살 소녀가 자신을 향한 비하일 수 있는 말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믿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 말은 누구한테 들었어?”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럴 거다. 그런 말은 냄새처럼 잡히지 않지만 몸속에 스민다. 그 냄새는 도처에 배어 있다.

며느리의 시누이 욕 “여자라 그런지…”
몰래 자주 인터넷에서 하소연 게시판을 본다. 그 억울한 사연들에서 솔직히 위대한 철학자도 잘 주지 못한 위안을 얻는다. 내 인생만 꼬인 건 아니구나. 분노의 댓글을 부르는 사연도 있다. 아들 앞으로 갓 지은 쌀밥과 살이 튼실한 갈비를 밀면서 며느리에겐 “아직 살이 남아 있네”라며 아들이 씹다 만 갈비를 건네는 시어머니 이야기다. 며느리인 작성자는 시어머니보다 자기를 편들어주는 척 말만 앞세우고 갈빗살 뜯는 시누이가 밉다고 했다. “여자라 그런지 잔머리가 장난 아니에요.”

차별의 지독한 속성은 당하는 사람 속으로도 스며든다는 거다. 타인의 시선은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자신을 구석으로 내몬 바로 그 차별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기도 한다. 최은영의 소설 <당신의 평화>에서 어머니는 평생 자기 속옷 한번 맘대로 못 사는 시집살이를 했다. 그 한을 풀어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은 큰딸이지 큰일 할 아들이 아니다. 그 지난한 인고의 시간을 보상해줘야 할 사람은 자기 대신 시댁 부엌으로 들어가야 할 며느리이지 잘난 아들이 아니다.

전인권은 자전적 성장기인 <남자의 탄생>에서 어머니의 아들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첫아들인 형을 낳았을 때, 어머니는 비로소 전씨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 혼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지만, 세 아들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와 쌀밥을 먹었고, 어머니와 딸들은 따로 둘러앉아 보리와 감자가 섞인 밥을 먹었다. 그건 어머니가 만든 규칙이기도 했다.

이 어머니들에겐 차라리 ‘여자는 결핍 인간’이란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차별을 견디는 더 쉬운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밥 먹을 때마다, 똥 쌀 때마다, 숨 쉴 때마다 먼지처럼 쌓이는 차별은 시나브로 자아를 무너뜨린다. 매번 찬밥을 먹다보면, 자신이 찬밥 먹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기 쉽다. 자신이 자기에게마저 미천해지면 자신이 속한 부류도 미천해진다.

딱히 무엇 때문인지 집어내기도 힘들다.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저학년 때만 해도 반장 선거는 성 대결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여자 후보에게 몰표를 주곤 했다. 그런데 5학년부터 판세가 바뀌었다. 여자아이들도 남자 후보를 뽑았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어차피 여자는 안 뽑히니 반장 후보에 남자들만 올리자고 했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때 나도 아마 남자 후보를 뽑았을 거다. 그게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제발 한 번이라도 커디가 옳았으면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가 쓴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에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나온다. 2017년 미국에서 대여섯 살 아이들에게 한 게임을 소개하고 반응을 봤다. “이 게임은 정말, 정말 똑똑한 아이를 위한 거야.” 다섯 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게임을 하겠다고 달려들었는데, 여섯 살 여자아이들은 뒤로 뺐다. “여섯 살 여자아이들은 여자라는 성별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했다.

한 연구에선 성인을 대상으로 미국 대학 교수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사람이 과학자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남자일 경우 외모가 변수가 되지 않았다. 여자일 땐 여성스러워 보일수록 과학자가 아닐 거라는 답변이 많았다. 다른 실험에서 스스로 객관적 능력만 본다는 사람일수록 조건이 같은 지원자 중 남성을 고용할 확률이 높았다. 편견이 편견이란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편견이 작동했다. 편견은 객관 뒤에 숨었다.

관계에 서툰 괴팍한 천재 남자는 얼마나 전형적인가. <닥터 하우스>는 내 인생의 몇 달을 족히 갈아넣은 미국 드라마다. 매회 구도는 똑같다. 천재 의사인 하우스는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을 집어내며 모험에 가까운 처방을 내린다. 하우스의 상관이지만 권한은 거의 없고 실제 업무는 하우스 베이비시팅인 닥터 커디는 하우스의 결단에 위험하다며 반대하는데 결론이야 만날 하우스 승이다. 커디가 있을지 모를 법적 분쟁 등 온갖 세속적 일에 골머리를 앓을 때 하우스는 강단으로 생명을 구한다. 시즌8까지 달리다보면, 제발 한 번이라도 커디가 옳은 에피소드를 보고 싶어진다. tvN에서 방영했던 <문제적 남자>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들만 떼로 고정 출연한다.

페레스의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보면, 여성은 ‘덜 총명한 인간’ 정도가 아니라 그냥 ‘덜 인간’이다. 그는 어마어마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며 “인간의 디폴트는 남성”으로 설정됐다는 걸 증명한다. 영어에서 ‘man’은 남자이자 인간인데 인간이란 의미로 써도 읽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남성을 떠올렸다. 포털에 축구 국가대표팀을 치면 남성팀이 나온다. 자동차 충돌 실험에 쓰는 인간을 닮은 인형은 남성 몸을 기준으로 만든다. 여성 몸을 기준 삼은 인형도 있긴 한데 조수석 실험에 쓰인다. 1960년대 나온 표준 사무실 온도를 내는 공식은 40대 남성의 기초대사율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기준에 따르면 사무실 ‘적정 온도’는 여성이 느끼는 ‘적정 온도’보다 평균 5도 낮다. 피아노 건반의 가로 길이는 122㎝인데, 뼘이 짧은 여성 피아니스트가 남성 피아니스트보다 통증이나 부상에 시달릴 확률이 50%가량 높다. 이 모든 디자인에서 인간의 몸은 남성 몸이고 여성은 ‘예외 사례’다.

100번 돌려 듣고 싶은 문장
나는 차별당한 적 없다고 오랫동안 믿었을 만큼 차별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불안은 도처에 있었다. 여자로 보일까봐, 우습게 보일까봐. 여성과 연관 검색어는 내게도 비릿한 비하의 대상이었다. 나와 9살 소녀에게 스민 폄하의 악취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소녀가 개를 또 쫓아오면 미국 부통령 당선자 카멀라 해리스의 승리 연설 동영상을 같이 보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단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100번 같이 돌려 듣고 싶다. 한 인간으로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100번 돌려 듣자고 하면… 소녀가 몽덕이와 나를 슬슬 피하겠구나.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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