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0일 해임된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맨 왼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경질 배경으로 리비아 모델을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11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볼턴)가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것은, 일종의 매우 큰 잘못을 한 것”이라며 “그것은 좋은 언급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카다피에게 일어난 일을 보라”며 다시금 “그것은 좋은 언급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 뒤 “(이로 인해) 우리가 차질을 빚게 됐다”고 말했다. 리비아 모델은 ‘선 핵포기-후 보상’을 뜻한다.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대통령은 2003년 3월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할 의사를 밝히고 비핵화를 이행했지만, 2011년 반정부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난 뒤 피살됐다.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에는 리비아 모델이 고스란히 담겼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볼턴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2003년 리비아에 핵개발 포기뿐만 아니라 화학무기와 생물무기, 그리고 탄도미사일을 모두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볼턴 방식이 결국 리비아 방식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해임하고 리비아 모델을 공개 비판해, 미국 정부 내에서도 리비아 모델은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리비아 방식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볼턴을 맹비난해왔다. 북한과 볼턴의 악연은 뿌리 깊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계산된 발언 2003년 조지 부시 행정부 당시 볼턴은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차관이었다. 볼턴은 2003년 7월 한 연설에서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을 “폭군적 독재자” “착취자” 등으로 불렀고, 이틀 뒤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볼턴을 “인간 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고 맞불을 놓았다. 2018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다. 볼턴은 국가안보보좌관 임명 전후 언론 인터뷰 등에서 북핵 해법으로 ‘리비아 모델’을 여러 차례 주장했다. 북한은 돌아온 볼턴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북한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문에서 “우리는 이미 볼턴이 어떤 자인가를 명백히 밝힌 바 있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 5월24일 볼턴이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5월27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볼턴을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는 안보 파괴 보좌관” “전쟁 광신자”라며 “이런 인간 오작품은 하루빨리 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외무성 대변인은 “군 복무도 기피한 주제에 대통령에게 전쟁을 속삭이는 호전광”이라며 조롱했다. 볼턴은 1970년 예일대를 졸업한 뒤 곧 나올 베트남전 징집 영장을 기다리지 않고 안전한 미 본토 메릴랜드 주방위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거칠어 보이지만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주장은, 매우 계산된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5월26일 트위터에 “북한이 작은 무기들을 발사했다. 이것은 나의 사람들 일부와 다른 사람들을 언짢게 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김 위원장이 내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볼턴의 ‘유엔 결의 위반’ 주장(5월24일)을 부정하고 대북 메시지를 조정한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반응은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글 다음날에 나왔다. 북한은 ‘연내 시한’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지도부를 미국 대통령 휴양시설인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하는 문제를 둘러싼 백악관 내부의 갈등도 볼턴 해고 배경으로 꼽힌다.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탈레반과 협상하는 것에 반대한 볼턴이 비밀 회동 계획을 언론에 흘렸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크게 화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밀 회동 취소와 협상 종결이 자신의 결정이라고 했는데, 볼턴이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 데 분노했다는 것이 <폴리티코>의 설명이다. 볼턴이 해고당한 뒤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게이트스톤연구소 비공개 오찬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협정 협상을 위해 탈레반 대표단을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함으로써 탈레반에 ‘끔찍한 신호’를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9월19일 <폴리티코>가 보도했다. 볼턴은 탈레반이 9·11 테러를 일으킨 이슬람 무장단체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한 점을 상기시키며 이는 9·11 테러 희생자를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연내 시한과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북-미 실무 협상에 나설 것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9월9일 북-미 실무 협상 재개를 제안하면서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 시정연설에서 북-미 협상 시한을 올해 말까지로 정해놓은 바 있다. 북한이 요구하는 새로운 계산법은 결국 비핵화와 상응 조처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다. 최근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상응 조처는 한마디로 안전보장 조처다. 정치, 외교, 경제, 군사 개념이 들어 있다. 군사 분야 안전 보장과 관련해 북-미, 남북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안전 보장을 위해 말이 아니라 미국 장거리전략폭격기, 스텔스기, 항공모함 등의 한반도 배치 중단이나 한-미 연합연습 중단 같은 실제 조처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북은 지난해 9·19 군사 분야 합의서 내용대로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꾸려 군사 신뢰 구축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2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