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 농단 재판 피고인들은 재판 잘하기로 소문난 판사들이었다. 방대한 수사 기록에 묻힌 실체적 진실을, 증거를 토대로 발라낸 뒤 판결하는 일에 능숙하다. 하지만 이들도 막상 검찰 수사를 받아보니 억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판사 땐 몰랐던 부당한 수사 관행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재판에서 법에 보장된 모든 권리를 동원해 검찰 수사의 위법성을 밝히겠다고 벼른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농단 재판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피고인(피의자)의 권리를 일깨워주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재판에서 드러나는 사법 농단의 실체적 진실은 사법 개혁은 물론 검찰 개혁의 필요성도 부각할 것이다. 피고인들의 말처럼 판사를 상대로 하는 수사까지 위법했다면, 검찰은 더 이상 가만 놔둘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됐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 공방을 거친 뒤 피고인들의 유죄가 입증되면 사법 신뢰를 위한 개혁의 고삐를 바싹 당겨야 한다. 사법 농단 재판이 ‘세기의 재판’이자, 법원과 검찰의 ‘진검승부’라 하는 이유다. _편집자
지난 3월11일 시작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은 ‘사법 농단’ 재판의 전초전 성격을 띤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가장 먼저 기소된 임 전 차장의 공판 태도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등 다른 피고인들의 재판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임 전 차장은 첫 공판부터 검찰에 포문을 열었다. “(검찰의) 공소장은 미세먼지에 반사된 신기루” “검찰 수사와 공소사실이 너무 자의적이다”며 날 선 공격을 했다. 그는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6부 재판장 윤종섭)에 “피고인의 주장과 증인 진술을 차분히 듣고 무엇이 사안의 진실인지 판단해달라”는 ‘당부’까지 하며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그의 태도는 양 전 대법원장 등 ‘윗선’들의 재판도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을 암시했다.
“검사님 웃지 마세요!” 소리친 피고인
8일 뒤 열린 2차 공판(3월19일)에서 임 전 차장은 검찰과 직접 충돌했다. 검찰 공소장에 나오는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집행 혐의를 반박하던 중 검사에게 ‘선빵’을 날린 것이다. 그는 “대외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운영비 예산으로 편성하는 것은 각 부처 상황에 따른 예산 편성 전략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미스라벨링’(mislabeling·상품명이나 지명을 잘못 붙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때 갑작스레 튀어나온 영어 단어가 낯선 듯 한 검사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임 전 차장은 곧바로 검사석을 노려보며 “검사님, 웃지 마세요! 김○○ 검사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법정 분위기가 싸해졌다. 검사들은 물론 재판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종섭 부장판사는 “피고인, 잠깐만요”라고 임 전 차장의 발언을 중단시킨 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 검사들은 재판부를 향해 “이건 주의를 시키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윤 부장판사는 고개를 들어 임 전 차장을 잠시 바라본 뒤 “그 말은 변론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지적은 재판부가 해야 할 일이다. 설령 그렇게 보였을지라도 앞으로 그와 같은 발언은 삼가달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시켰다. 임 전 차장은 “네, 알겠습니다”라며 나머지 발언을 이어갔다.
재판에서 누군가에게 웃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재판장뿐이다. 재판장에게는 재판 진행에 방해되는 모든 행동을 제지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재판장이 검사에게 이런 주의를 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말을 듣는 쪽은 주로 피고인이나 변호인, 증인, 방청객이다. 임 전 차장이 검사의 웃음이 거슬렸다면 재판부에 주의를 시키도록 요청하는 게 맞다. 그랬다면 ‘아직도 판사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임 전 차장의 발언을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 검사의 웃음을 지적한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지키려는 정당한 행위라는 설명이다. 검사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피고인이 변론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이는 방어권을 침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법원 출신 변호사는 “재판에서 검사가 직접 피고인을 야단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언론들이 그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법정에서는 검사도 피고인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임 전 차장의 발언은 ‘법원 야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가 2006년 10월30일 제주지법에서 열린 선거법 위반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7년 11월15일 김 전 지사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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