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11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이 사법 농단 사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공동사진취재단
박병대·고영한 영장 재청구될 수도 양 전 대법원장은 또 외교부에서 ‘일본 전범기업의 손배 책임이 확정되면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낼 수 있도록 조처했다. 2015년 1월 자신이 주재한 대법관 회의에서 민사소송규칙에 ‘국가기관 등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런 시나리오를 이민걸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통해 외교부와 조율하도록 했다. 그는 또 대법원장 집무실 등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법률사무소의 한상호 변호사를 만나 외교부 의견서 제출 계획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는 한 변호사의 진술과 그의 사무실에서 발견된 문건을 통해 확인된 것으로 전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아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에 개입한 이는 이규진 당시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었다. 이 밖에 ‘판사 블랙리스트’ 관련 보고는 법원행정처 부장급 판사에게 직접 받았다. 수사팀 관계자는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은 부장급 판사가 여러 안을 보고하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양 전 대법원장은 차장-처장 라인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법행정’을 지휘했다. 따라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 소명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수사팀의 판단이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할 경우 앞서 영장이 기각된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의 영장을 재청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세 명의 영장을 한꺼번에 청구한다면 법원이 이를 모두 기각하기가 쉽지 않다. 이 경우 직제상 최고 책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의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수사팀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박·고 두 대법관의 영장을 한꺼번에 청구한 것도 법원에서 기각됐기 때문에 검찰이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수사팀 관계자는 “(두 전직 대법관 영장의 재청구 여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조사 이후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명박·남재준도 무죄… 양승태도? 사법 농단 수사의 최대 고비는 앞으로 벌어질 재판이다. 사법 농단 수사에 잔뜩 불만을 품은 판사들이 즐비한 서울중앙지법과 고법이 검찰 수사 결과를 어느 정도 인정할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인다. 조짐은 별로 좋지 않다. 최근 법원은 사법 농단 관련자에게 적용될 직권남용죄에 대해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법원은 지난해 10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직권남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다스 소송을 위해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을 미국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로 임명하고 개인 재산 관리에 국세청 파견 직원을 동원하는 등 대통령의 직권을 남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대통령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가 될 수는 있으나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우선 지시가 대통령의 권한에 속해야 하는데 다스 소송 등은 대통령 권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원은 지난 1월4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사찰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를 두고 법원이 사법 농단 재판에 앞서 직권남용죄의 판단 기준을 까다롭게 가다듬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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