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경기도 안산 단원고 고 김웅기 학생의 아버지 김학일씨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전남 함평군 신광면을 걷고 있다. <한겨레21>은 세월호 유가족 도보 순례단과 38일간 함께 길을 걸으며 페이스북으로 현장 중계했다.
십자가를 도맡아 짊어진 김학일씨는 아들을 만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웅기군은 4월29일, 김씨가 사준 줄무늬 남색 남방을 입고 199번째 사망자로 떠올랐다. 안치실에서 만난 아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자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팔과 다리,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오래 지녔던 묵주를 뻣뻣해진 아들 손에 감아주며 기도했다. “아들의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김씨는 “그때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아픔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힘” 아들이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 김씨는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순례단을 이끌었던 십자가를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하며 그는 말했다. “억울하게 죽은 305명의 영혼과 고통이 십자가와 함께 있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네 차례나 세월호 유족을 만난 교황은 바티칸으로 돌아갈 때 그 십자가를 비행기에 실었다. 하지만 김씨는 오늘도 아들 방에서 속죄의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미안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은 아버지를 여전히 휘감고 있었다. 순례단은 “평범한 주부”였던 정인선(39)씨의 삶을 180도 바꾸었다. 그는 순례단이 전남 나주에서 출발하던 날, 초등학교 2학년 딸 수린을 데리고 차와 과일을 들고 응원하러 나갔다. 축 처진 어깨 위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두 아버지의 뒷모습은 서글펐다.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그는 딸을 지원 차량에 태우고 대전 구간까지 10일 동안 걸었다. 사회문제에 벽을 쌓고 살았던 그는 길 위에서 새로운 인연을 쌓으며 세상 속으로 한발씩 걸어 들어갔다. 엄마의 길을 동행했던 수린도 성장했다. “언니·오빠들이 하늘에서 내가 들고 있는 촛불처럼 반짝이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통령님!! 행복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주세요.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제발! 세월호 가족을 만나주세요.”(수린의 일기 중에서) 정씨는 ‘세월호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월호 광주시민상주모임은 순례단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세월호 참사 직후 광주의 마을별로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 모임이 손을 맞잡고 광주시민상주모임을 만들었다. ‘진실 마중 사람 띠잇기’가 첫 사업이었다. 이들은 세월호 선원들 재판을 방청하러 광주로 오는 유가족들이 볼 수 있도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손을 맞잡고 들었다. 진실 마중은 7월14일까지 42차례나 진행됐다. 광주시민상주모임과 순례단의 만남은 정기열(49)씨가 주선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그는 순례단이 고향 땅을 밟는다는 소식을 듣고 개인적으로 식사와 잠자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시민상주모임이 조직적으로 돕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정씨는 “순례단의 하루하루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자발적 동행자가 급증해 지원단이 준비한 식사는 늘 부족할 듯했지만 결국 서로 배려한 덕에 오히려 남았다. 나눔과 연대의 경험은 광주시민상주모임에도 자양분이 됐다. 이후 광주시민상주모임은 2014년 11월15일부터 1천 일간 마을별로 돌아가며 걷는 ‘천일 순례’를 진행했고, 지난해 ‘탄핵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는 등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들은 올해 ‘들불상’과 광주시민의 날 특별상을 받았다. 학창 시절 끓여주던 엄마의 죽 한울남도아이쿱생협 이사인 이명숙(51)씨는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그날 오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책임만 회피하고, 컨트롤타워가 없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순례단이 온다는 소식을 아이쿱 조합원에게 알리고 지원을 준비했다. “얼마나 큰 상처를 끌어안고 두 아버지가 걷는지 짐작했기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해 아침을 준비했다.” 나는 그 아침밥을 또렷이 기억한다. 조합원들은 수십 명의 아침 밥상을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식재료를 다듬고 새벽마다 모여 죽을 끓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죽을 먹으며 나는 학창 시절 시험날 끓여주던 엄마의 죽을 떠올렸다. 이씨는 “나도 (순례단을 지원하며) 치유를 받았다.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힘을 얻었고 세월호와의 연대를 내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곡성(전남)=글·사진 정은주 <한겨레>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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