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3일,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 등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등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국회 정문 앞에서 열었다. 이들은 27년 어둠에 묻힌 사건의 진실을 국가가 답해주길 요구한다.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제공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두들겨패다가 9명이 산을 내려왔을 때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들과 마주쳤다. 호루라기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는 지나가던 트럭을 잡아 사상역 근처의 후미진 길에 자신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사상역이 코앞에 보였고 ‘어!’ 하는 순간 이미 서너 명이 튀어나오더니 트럭을 에워쌌다. 아이는 그렇게 다시 복지원으로 돌아왔다. 하룻밤 만에 8명이 붙들려왔다. 그날 아이는 ‘빳다’를 맞고 허벅지가 ‘나갔다’. 달아난 1명은 6개월 뒤 잡혀왔다. 1980년 여름, 아이는 또다시 9명과 함께 복지원을 탈출했다. 이번에는 철수를 앞둔 낚시공장 사장님과 미리 모의해두었다. 사장이 아이들의 거처를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숨어 살다시피 지내며 낚싯바늘을 묶었다. 어느 날 찬거리를 사러 국제시장에 나갔던 1명이 복지원 단속반에 붙들렸다. 나머지 아이들은 부리나케 짐을 싸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아이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1년 뒤 아이는 엄마와 형을 찾았고 형제원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를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던 형제는 끝내 엄마와 화해하지 못했고 동생이 된 그의 친구는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자살했다. 올해 초 형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고통을 나누어가졌던 세상에 둘도 없는 동지를 떠나보내고 아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없었다”는 비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을 때 오십이 넘은 그를 만났다. 살면서 이토록 생생하고 구체적인 국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강력한 힘은 마치 ‘가위’ 같았다. 작고 왜소한 아이의 뒤를 경찰과 공무원이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들이 합동작전을 펼쳐 아이들을 한곳으로 몰아가면 아가리를 한껏 벌린 형제복지원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가족과 공동체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주된 표적이었다. 박인근(형제복지원장)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철창 속에 감금한 채 채찍을 휘두르며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두들겨패다가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다. 투견처럼 서로 물어뜯게 하여 죽고 죽이는 것을 관망하다가 사체 은닉을 지시했다. 이것은 과장도 은유도 아니다. 12년간 2만여 명이 가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했고 513명이 사망했다. 교도소 같기도, 아우슈비츠 같기도, 시베리아 형무소 같기도 한 이 생지옥의 더 끔찍한 비극은 수용인들을 짓밟고 고문하고 살해한 이들이 나치도, 교도관도, 악랄한 고문기술자도 아닌, 이곳에 잡혀온 또 다른 수용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한쪽이 짧은 제 다리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철창의 틈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저 먼 곳을 향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동물적 탈출. 아이는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국가가 그곳에 있었다. 작은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유능한 경찰의 손아귀에 국가가 있었고, 아이를 인계한 뒤 성실하게 쌓여가는 공무원의 승진 가산점에 국가가 있었다. ‘갱생’을 외치면서 아이들의 월급을 착복하는 사회사업가의 금고 안에 국가가 있었고,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 사람들의 태연한 일상 속에 국가가 있었다. 잠잘 때도 칼을 품고 자야 했던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뒤 27년이 지났다. 박인근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복지원은 그 이름만 바꾸었을 뿐 건재하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그가 여전히 생존자들을 쫓아다니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악몽 같은 기억과 싸우느라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7년 전 자살했던 아이의 친구 역시 박인근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며 자전거에 방망이를 싣고 다니고 잠을 잘 때도 칼을 품고 잤다. 이제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 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박인근은 자신이 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먹여주고 재워줬다고 주장했어요.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박인근의 방법이 결국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니까요.” 그 역시 박인근에게 쫓기며 살아온 셈이다. 이들의 고단한 달리기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힘없는 아이들을 야비하게 뒤쫓던 국가는 언제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것인가.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마이너리티 리포트’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