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스’는 퀴어들, 특히 게이들의 ‘민속 의상’이라고 여겨질 만큼 퍼레이드에서 상징성을 가진다. 노출이 싫다는 얘기는 퀴어 퍼레이드가 불편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적대자들에게 핵심은 ‘빤스’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퀴어 퍼레이드 행사는 바로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모든 사람을 이성애자로, 비트랜스젠더로 가정하는 사회에서 퀴어의 몸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퀴어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급진적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만든다. 퍼레이드는 퀴어를 가급적 인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회적 태도를 거스르는 행동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퍼레이드 행사에 불편함을 느끼며 “퀴어건 뭐건 너네끼리 조용히 지낼 것이지 꼭 밖으로 나와야겠니?”라고 ‘조언’한다. ‘빤스’ 복장은 불편함을 가중하는데, 이것은 퀴어를 성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와 관련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떠드는 게이의 이미지 중 하나는 남성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며 섹스를 하려 드는 과잉 성애화된 존재다. 하지만 방송에 등장하는 게이 연예인은 자신의 성생활 혹은 연애생활을 거의 밝히지 않는다. 대신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 동네 주민이 좋아해주는 모습을 주로 재현한다. 두 가지 이미지는 모순이 아니다. 성적인 실천을 공공연히 떠들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상대적 권력 우위를 점할 때다. 그렇지 않은 존재, 혹은 비규범적 존재는 과하게 성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는 동시에 성적인 것을 부정당하고 성적이지 않은 존재로 살 것을 요구받는다. ‘빤스’ 복장은 바로 이런 요구를 거부한다. 퀴어 퍼레이드 맥락에서 ‘빤스’ 복장은 이성애 중심 사회가 퀴어의 모습 중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공공연히 전시한다. 그러니 이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게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극소수의 기독교 교회가 퀴어 퍼레이드를 ‘빤스 카퍼레이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다. ‘빤스’ 복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우리를 비난한 소수의 몇몇 교회가 퀴어 퍼레이드에 우호적으로 반응하거나 ‘이제 괜찮다’며 용납할까? 아니다. ‘빤스’는 그냥 우리를 비난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핑계에 불과하다. ‘빤스’를 안 입으면 그다음엔 퍼레이드 차량을 포기하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지난 퍼레이드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퍼레이드를 방해한 집단은 우리가 차량만 포기한다면 길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럼 그다음엔? 아마도 퍼레이드 자체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다음엔? 글쎄… 1년 365일 내내 퍼레이드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단 하루뿐인데도 이렇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즉 단 하루 떠드는 우리의 목소리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다음엔 무엇을 요구할까? ‘빤스’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지만, 또한 퀴어 혹은 LGBT를 적대하는 이들에게 핵심은 ‘빤스’가 아니다.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빤스’ 복장이 일부에게 불편함을 준다고 해서 퀴어나 LGBT가 자중할 일은 아니다. 자중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 행위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이성애 중심 사회, 모든 몸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의 맥락으로만 혹은 ‘(상대적) 권력자’의 맥락으로만 독해하는 인식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회와 인식이 당장 바뀔 것이라고 믿진 않는다. 그래서 이성애 중심 사회를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어떤 불편함을 계속 생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내년, 내후년, 그 이후에도 ‘빤스’ 복장을 원하는 더 많은 사람이 ‘빤스’ 차림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빤스’가 더 이상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무언가로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