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지난 11월 야유회 장소인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입구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노들장애인야학 제공
8년이 흘렀다. 평균 나이 마흔을 넘긴 사람들에게는 단풍놀이가 제격인 계절이지만 올해 노들의 신이 점지한 곳은 에버랜드다. 천장 없는 놀이공원에 첫눈이 내렸다.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 지하철을 네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을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찾아왔다. 강산 위에는 경전철이 뚫렸고, 그이들의 옆에는 활동보조인이 있었다. 무사히 정문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미션처럼 자유이용권과 식사권이 주어졌다. 장애인 여행 바우처가 사용되었다고 했다. 세상의 변화가 다시금 놀라웠다. 활동보조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돈 걱정이 없었다. 이제 함께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보조인·복지카드 덕에 몸은 자유로웠지만 평일이라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인기 있는 몇몇 관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장애인 먼저’. 복지카드가 요술을 부려 우리를 줄의 맨 앞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호박마차가 아니라 그냥 호박. 휠체어를 탄 A는 탑승할 수 없다. A가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자유이용권을 쥐고 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조급해진 활동보조인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휠체어에서 분리된 A의 몸이 축 늘어져 위태로워 보였다. 곧 둘 다 너덜너덜해지겠군,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J가 휠체어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휠체어에 기대야만 몸을 곧추세울 수 있다. “어차피 무서워서 못 타” 하며 순순하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추워 보여서 코끝이 찡했다. 그는 결국 놀이기구 타는 것을 포기하고 자유를 빼앗긴 동물들을 보러 갔다. 나는 그를 따라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갈등은 짧았다. 그의 옆에는 활동보조인이 있었고, 내 손에는 비싼 자유이용권이 쥐어져 있었다. 그동안의 모꼬지에서 일만 하고 놀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나는 바이킹을 타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늦은 저녁 강당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전동휠체어들이 무대를 제외한 삼면의 벽에 착 달라붙어 일제히 전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웅~ 낮고 노곤한 기계음이 나에게 묻는 듯했다. 바이킹은 재밌었니. ‘함께 놀기’란 ‘함께 투쟁하기’보다 열일곱 배쯤 어려웠다. 모든 놀이기구의 출구를 빠짐없이 기프트숍으로 연결시켜놓은 영악한 자본이 산도 깎고 강도 덮는 능력을 가지고도 기어이 휠체어 하나 들어갈 통로를 열어놓지 않았다. A와 함께라면 더딘 속도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고, J와 함께라면 놀이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놀이의 연대를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분리해 내 옹졸한 놀이의 영역을 확보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돌이켜보면 ‘함께 놀기’는 모꼬지를 떠난다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과정 속에서 증명해야 하는 과제 같은 것이었고, 우리가 ‘함께 산다’는 문제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어지는 조건은 계속 달라졌지만 작은 차이를 들추어 우리의 분리를 부추기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갈등했고 고개 돌렸고, 분열했다. 실패를 고백할 때 우리는 진실하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지 모른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 실패했고 함께 사는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분열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그 조건이 틀렸음을 말할 책임만 있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분열의 추억이 쌓인다. 함께 싸워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진정한 모꼬지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