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의 한 장면.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잊지 않으려고 몸에 문신을 새겨넣는다. 한겨레 자료
‘객관적 진실’은 존재할까 그런데 남편이 출근한 뒤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그녀에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닥터 내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크리스틴이 지난 몇 달간 남편 모르게 자신을 찾아와 상담을 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권유에 따라 매일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잠을 자고 나면 상담을 받고 일기를 쓴 사실은 물론 닥터 내시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크리스틴에게 옷장에 일기장을 감춰두라고 지시하고는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일기장을 찾아 읽어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옷장을 열어본 크리스틴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첫 페이지에는 파란색 잉크로 세 단어가 대문자로 적혀 있다. ‘벤을 믿지 마라.’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쓴 일기를 읽으며 머릿속에서 한번 사라졌던 기억을 다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롭게 겪은 일을 적어나간다. 얼마 뒤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가 일기에 적은 내용과 남편이 설명해주는 사실이 달랐던 것이다. 어느 한쪽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세 종류의 ‘과거’가 존재한다. 그녀가 물어서 일기에 적은 과거- 닥터 내시뿐만 아니라 어렵게 찾아낸 옛 친구도 크리스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준다-, 남편이 매일매일 들려주는 과거, 이미 잊어버렸지만 간헐적으로 환각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의 과거. 어느 것이 진짜일까. 그리고 그녀가 실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만일 닥터 내시의 전화를 못 받았다면, 그래서 남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과거만이 존재했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알 수 없었을 ‘다른 과거’는 마치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일처럼 차원이 다른 세계가 아닐까. 여러 겹으로 얽힌 기억 속에서 그녀는 괴로워한다. 때로는 남편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때로는 자신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인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떤다. 그녀는 과연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왜 남편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까. 아니, 남편의 말이 거짓말일까. 그가 들려주는 말이야말로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까. 때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적극적인 허위의 기억이 진실을 확정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패트릭 콕번과 헨리 콕번이 쓴 실화 <헨리의 악령>(Henry’s Demon)은 정신분열증 환자인 아들과 저널리스트 아버지가 자신들의 경험을 적은 책이다. 병에 걸린 아들은 나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집을 나가 강에 뛰어드는 등 환각 때문에 생명을 잃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긴다. 이때 아버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아들이 때때로 환각을 본다는 사실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나중까지도 아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 환각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는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실제의 차이 크리스틴은 결국 어느 정도 기억을 되살리고 실제 있었던 사고(혹은 범죄)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 책의 끝부분에 실린 반전을 읽고 나면 독자는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세 가지 버전의 ‘과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은 다른 이야기가 또 있는 게 아닐까. 만일 우리가 남편이 크리스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만 읽을 수 있었다면 그것을 진실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또 다른 버전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실제로 존재하는’ 크리스틴의 과거와 ‘우리가 아는’ 그녀의 과거는 과연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어떤 것이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진실’을 근거로 그녀나 그녀의 남편을 단죄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