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와 소년의 기괴한 사랑 이야기에 연쇄살인 사건이 결합된 로맨틱 미스터리 영화 <백야행>의 한 장면.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다. 한겨레 자료
7년이 지난 어느 날, 시스코는 오에 슌데이라는 추리소설 작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다름 아닌 히라다 이치로였다. 시스코가 파산한 아버지를 따라 행방을 감춘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히라다는 우연한 기회에 필명으로 소설을 한 편 썼다가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몇 권의 책을 출간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그는 시스코를 찾아나선다. 그녀가 받은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변할 줄 모르는 그의 복수심으로 가득한 협박장이었다. 남편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편지의 내용은 시스코를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선 히라다는 그녀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정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은 물론 침실에서 벌어지는 남편과의 내밀한 일까지 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남편을 먼저 죽이고 그녀까지 살해하겠다고 예고를 한다. 불안에 사로잡힌 시스코는 히라다의 라이벌 격인 소설가를 찾아가서 의논을 한다. 그가 이 책의 화자인 사무가와다. 오에 슌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던 히라다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 역시 추리소설가인 사무가와는 그동안 히라다가 쓴 책의 내용을 참고해 그의 행적을 찾아나선다. 히라다가 시스코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한 방법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몰래 그녀의 집에 잠입한 뒤 천장 위에 숨어서 방을 내려다본 것이다. 사무가와는 시스코의 침대 위에서 히라다가 흘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장갑 단추를 발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이는 사이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다. 시스코의 남편이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소설에는 가능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된다. 시나리오 1: 복수심에 불타는 히라다가 시스코의 남편을 살해한 경우. 가장 단순한 결론이다. 보답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사랑이 질투와 집착으로 변질되고 결국 연인이 가장 아끼는 존재를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살해된 이후에 갑자기 뚝 끊기는 협박장, 그리고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된 일기장과 히라다의 글씨를 연습한 흔적은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나리오 2: 남편이 자작극을 벌이다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 시스코의 걱정과 달리 남편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내를 때리며 극단의 쾌락을 추구하던 그는 히라다의 책을 사다 읽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트릭(천장 위에서의 염탐)을 시도해보거나 필체를 흉내 내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협박장을 보낸 것도 남편이었을까. 이것이 맞는다면 그는 담벼락에 서서 히라다 행세를 하다가 추락사한 것이다. 시나리오 3: 시스코가 옛 애인의 소행, 혹은 남편의 자작극을 가장해서 남편을 살해했을 경우. 오에 슌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쓴 것은 히라다가 아니라 시스코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결론이다. 사무가와의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스스로 만든 협박장을 보여주고 옛 애인이나 남편이 한 일로 돌린 것이다. 남편을 살해한 것은 물론 사무가와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사무가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시스코를 추궁했고, 결국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과연 진실은 세 가지 중 어느 것일까. 자신 있게 시스코에게 따져묻던 사무가와는 막상 그녀가 자살하자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의혹에 휩싸인다. 스스로도 시스코를 향한 욕망에 굴복했던 그는 시스코가 자살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랑 속에 존재하는 독자의 처지에서는 어떤가. 누가 범인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 가지 시나리오가 모두 설득력 있고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보면 증오에 의한 것 못지않게 보답받지 못한 애정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체포된 범인이 피해자에 대한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말한 ‘음울한 짐승’은 모든 사랑 속에 존재하는, 언제든지 극단적인 형태로 돌변할 수 있는 면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하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 목록에서도 사랑을 빠뜨릴 수는 없다.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