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대표는 ‘서울어머니학교’의 의미에 대해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인 어려운 분들과 자신이 가진 걸 나누는 것일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학교 운영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개인적으로 저한테도 배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거겠죠.” 1956년생인 최창우 대표는 지리산 청학동 출신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며 다 함께 농사를 짓고 한학을 배우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배움의 길은 계속 차단됐다. 중학교에도 사정상 진학할 수 없어 야학을 다녔지만 그마저도 곧 없어졌다. 도시로 나와 일을 하며 떠돌다가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학하겠다고 마음먹고 귀향했으나, 농사가 흉작이라 그도 어렵게 되어 또다시 도시로 나가야 했다. 고달픈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군 입대 전에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보고, 제대 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그 자신이 힘들게 배운 만큼, 교육의 가치가 마음속 깊이 크게 자리잡았다. 아마도 입 하나라도 덜려고 어린 시절부터 식모살이를 하거나 하나뿐인 남동생을 위해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우리 어머니 세대 역시 주어지지 않는 기회에 한이 생기고, 배우고 싶어 목이 말랐으리라. 1989년 최 대표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수배자 신세로 숨어다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그러나 그에게는 야학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다. “저는 정규교육의 혜택은 못 받았지만 다른 분들의 헌신으로 야학에서 혜택을 받았죠. 그런데 정작 대학에 다닐 때는 진로를 위해 공부하는 데만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과 부채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느라 그 혜택을 다시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뒤늦게나마 야학에 찾아갔지만, 대개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교사진 사이에 30대의 최 대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서울 상계동의 전봇대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만큼 조그만 쪽지를 발견하며 새로운 길을 찾았다. 빛바래서 글씨를 겨우 알아볼 수 있던 그 쪽지는 어머니 야학을 모집하는 광고였다. 그곳에서 교사로 시작해 2~3년 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서울 다른 지역의 어머니들까지 보듬을 공간을 만들었다. “어머니들이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많이 좋아하셨지요. 어떤 분은 경남 마산에서 올라오셔서 자취를 하시기까지 했어요.” ‘문맹’이라는 이름의 고통 “나의 동생은 세무서에서 근무를 합니다. 세무서에 일보러 오는 사람 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글을 모르는 누나를 생각하며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합니다. 고마운 동생입니다.”(글솜씨 자랑대회 버금상, 샛별반 채필숙 학생의 글) 글을 모르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 은행 업무를 보기 힘들고, 간판을 읽을 수 없으며, 개념을 익히기 어려워 TV 뉴스조차 알아듣기 쉽지 않다. 축구를 즐기기도, 쇼 프로그램을 즐기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보 격차가 더 극심하게 벌어져 가족 간에도 소통이 단절되는 문제가 생긴다. 마침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감명 깊게 보았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최 대표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기에 총명한 사람은 반나절, 아무리 모자란 사람도 열흘이면 다 깨우칠 수 있다고 하던데, 왜 어머니들은 살아오는 동안 독학을 해서 배우시지 못했는지, 실제 배우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지. 나는 자연스레 글을 익히고 읽고 써온 사람으로서의 오만을 숨기지 못했다. “2년 이상 배워도 쉽지 않아요. ‘가갸거겨’ 안다고 글을 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마 지금 정부에서 문맹률이 영 점 몇 프로, 거의 문맹이 없다고 발표하는 걸 보면 그것만 가지고 글을 안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영어도 알파벳만 외우면 글을 안다고 할 수 있게요.” 어머니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소리와 글자 형태를 동시에 익히지 못한 탓에, 습관으로 굳어진 소리에만 의지해 글자를 써야 하기 때문에 익히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어느 정도 글을 번듯하게 쓰려면 3~4년은 필요하다. 어머니들이 쓴 글을 실제로 보면 ‘즐겁게’를 사투리 발음 그대로 ‘절겁게’라고 쓰거나, ‘대학로’를 ‘대학노’라고 쓴 표현들이 많이 발견된다.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와 체력의 한계, 공부만 할 수는 없는 환경도 장애로 작용한다. 문맹이란 글자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기보다는, 자신의 의사를 글로 써서 표현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2003년 10월8일 <한겨레> 기사는 한국의 비문해율이 25%, 즉 어른 4명 중 1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문맹률이 낮은 나라’라는 일반적 인식과 크게 차이 나는 결과다. 2004년 한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충북 보은·옥천·영동 지역의 50살 이상 주민 386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결과 43.8%인 169명이 읽기와 쓰기를 모두 못하거나 어느 한 가지를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1년 12월28일 구식 난로 때문에 공기는 탁하고 온기는 부족한 교실에서, 최창우 대표가 어머니들을 상대로 한글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현재 최창우 대표는 서울어머니학교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면 초등교육과정으로 인증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학교 건물의 평수가 모자라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학교 환경 개선이나 운영에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은 ‘농협 1141-01-050984’(예금주 서울어머니학교)로 후원금을 보내면 된다. 교사로 지원하고 싶다면 hlog_m00082@naver.com으로 전자우편을 보내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