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평택시에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와 한백겸이 지은 〈동국지리지〉. 한백겸은 공물을 쌀과 베로 통일하자고 제안해 대동법의 초석을 놓았다. 한겨레 자료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자로가 스승에게 물었다. “정치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서 백성보다 앞서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말씀을 더 해주십시오.” “싫증내지 않는 것이다.” 한백겸이 학문을 하는 태도는 싫증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조선 바로 이전 시대인 고려와 고려 앞 시대인 삼국과 삼한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삼한의 이름에 대해서는 한백겸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정론을 세웠다고 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한백겸은 동해와 서해에 조수가 있는지를 탐구했다. 동해에는 조수가 없다는 한백겸의 설은 이후 여러 학자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백겸이 거론한 여러 논증은 시대와 개인의 한계를 가졌던 만큼 오류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치를 갖는 것은 그만의 창의적 사고와 이론을 구축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대동법의 근간 마련 학문은 개인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에 그칠 수 없다. 한백겸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한 것 외에 요즘 기획재정부에 대응되는 호조에서 참의를 지냈다. 호조참의는 호조판서와 호조참판 다음의 관직으로 정3품직이었다. 한백겸은 호조참의를 사직하는 글과 함께 ‘공물변통론’이라는 글을 올렸다. 공물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의견이었다. 공물은 중앙에 올려보내도록 지방마다 정해진 생산품인데, 강경의 인삼, 한산의 모시, 제주의 말 등과 같이 지방 특산품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해마다 기후 등의 영향으로 특산품 마련이 일정치 않고 이를 중앙까지 운반하면서 각종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공물로 인한 백성의 피해가 컸다. 이를 줄이기 위해 유성룡은 정해진 토지 크기별로 일정한 쌀을 거두는 것으로 공물을 대신하자고 했다. 공물을 쌀로 바꾸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운송을 위해 배가 정박한 곳으로 옮기는 거리에 따라 편의가 달랐다. 그래서 한백겸은 운반 거리가 먼 경우 쌀 대신 베로 바꾸는 방법을 제안했다. 한백겸의 의견은 영의정이던 이원익에 의해 재차 거론되었고, 우선 경기 지역에서 시험됨으로써 이후 전국적으로 행해진 대동법의 시작이 되었다. 경제적 변혁이던 대동법의 시행 배경을 몇몇 관료의 우수한 의견 때문만으로 집약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변란이 있었고 변란을 겪은 국가와 백성의 고통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백겸의 제안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의 필요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방향을 정리했다는 점에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 사건은 수백 명의 양반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일대 사건을 촉발했다.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는 이야기가 시전 거리에 나돌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목자와 전읍은 한 글자의 한자를 쪼갠 파자(破字)로 목자는 이(李)씨 왕조를, 전읍은 정(鄭)씨 성, 즉 정여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왕조를 물리치고 새롭게 왕이 되고자 한 죄로 관군에 쫓기던 정여립은 결국 자살했다. 하지만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지독한 처벌은 계속되었다. 한백겸은 당시 안악현감이었는데, 안악이 속한 황해도는 정여립 반란의 진앙지였다. 한백겸은 정여립과 모반한 죄인들을 직접 잡아 가두기도 했다. 그런데 한백겸은 정여립의 조카인 이진길과 교분이 있었다. 한백겸은 역적의 주검을 거두어주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형을 받고 유배에 처해졌다. 전하는 자료에 차이가 있어서 한백겸이 거둔 역적의 주검은 정여립일 수도 있고, 이진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정여립이나 이진길의 주검을 수습했다는 것이다. 한백겸과 함께 형을 받은 사람으로 김빙이 있었다. 김빙은 역적의 주검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다 죽었다. 친구였던 역적의 주검을 거두다 왕을 죽이려는 반란 사건이었기에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거나 이에 동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역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백겸은 역적의 주검을 거두었고 유배된 뒤 3년이 지나서야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에 대한 사람됨이 평해지기 마련이다. 한백겸이 세상을 등졌을 때 세상의 평은 ‘단중’(端重)과 ‘평서’(平恕)였다. 단중이란 단정하고 정중함을 뜻하고, 평서란 평정을 지키며 관대하고 인자함을 뜻한다. 즉 단아하고 관대한 인품을 가졌다고 칭송되었다. 얼핏 단아하고 관대하다고 하면 그저 자상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백겸은 다스림과 생활에 관련된 여러 학문을 깊이 있게 탐구해 자신만의 논설을 가질 정도로 치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한 강직함은 앞서 정여립 사건에서 역적의 주검을 수습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백겸에 대한 인물평에서 아전을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은 배경은 이와 같았다. 한백겸은 평상시에 자상하되 선택의 순간이나 필요한 일을 수행해야 할 때는 강직하면서도 명석하게 선택하고 일처리를 했다. 경서와 역사, 경제를 비롯해 접하는 사물의 이치에 궁구하면서도 창의적이던 한백겸이었기에 아전을 제압해 공정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었다. 이선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