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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색깔아, 덤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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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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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구 변호사 국정원장 임명하며 색깔공세 정면 돌파…공직문화에 하나의 전기 될 것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 변호사를 국가정보원장에 임명하면서 ‘강단’을 발휘했다. 국회 정보위원들이 여야 가릴 것 없이 고 변호사가 좌파적 색채가 짙다며 ‘색깔 덧칠하기’ 공세를 폈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노 대통령은 4월25일 고 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할 때 행세하던 사람이 나와서 색깔을 씌우고…”라며 일부 정보위원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안기부 간부 출신으로 고문수사 시비에 휘말려 있는 정형근 의원(한나라당) 등을 겨냥한 것으로 읽혔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희생자들

사진/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4월25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보수언론과 한나라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 등 그 전신 이래 내내)이 고위 공직자를 과녁으로 삼아 색깔공세를 펼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첫 희생자였다. 자유주의적 개혁파로 분류되는 한 부총리는 취임 뒤 ‘이인모 노인 북송’ 등 전향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한 부총리의 대북화해론을 “나이브한 감상적 통일론이다. 스스로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한다”며 사실상 경질을 요구했다. <월간조선>은 ‘한완상의 충격적인 대북관’이란 제목으로 그가 ‘위험한 통일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집요하게 공격당하던 한 부총리는 결국 몇달 뒤인 연말 개각에서 교체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최장집 교수(고려대)가 제물이 됐다. <월간조선>은 최 교수의 한 저작을 문제삼아 “6·25전쟁을 평가함에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불리하게, 북한에는 유리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최 위원장은 “논문의 전체 문맥은 전쟁 발발의 최종적 책임이 북한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도 <월간조선>은 논문의 전체 논지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고 반박했으며, 재판부는 최 위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월간조선> 배포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최 위원장은 석달 뒤 위원장직에서 경질됐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색깔공세의 최대 피해자였음에도, ‘여론’으로 포장한 냉전수구세력의 길들이기에 굴복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반면 노 대통령은 색깔공세에 관한 한 ‘떡잎’부터 달랐다.

색깔공세의 ‘충격과 공포’ 효과 반감

노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가 장인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자 유세를 통해 “장인은 해방되던 해에 실명한 분인데 무슨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처가의 좌익경력을) 알고 결혼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버릴 수는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유세장의 대의원들은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으며, 청중석에 앉았던 부인 권양숙씨는 눈물을 지었다.

그는 이어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고향을 찾았을 때도 장인의 선영을 일부러 찾아 색깔시비를 정면돌파할 의지를 비쳤다. 그는 선영 앞에서 “해방 전후에 죽창과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은 논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편을 가른 대로 바닥에서 싸운 시대와 역사의 피해자”라며 “앞으로는 성역도 금기도 없는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공직문화에 하나의 전기가 될 것 같다. 냉전수구세력이야 앞으로도 색깔공세를 거듭 시도하겠지만, 그 공세에 따른 ‘충격과 공포’ 효과는 이로써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색깔공세의 덫에 걸리면 ‘죽는다’는 과거의 코드가 막을 내리게 됐다는 이야기다.

한겨레 정치부 박창식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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