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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권력의 공포가 사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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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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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리더십 떠받치는 정권유지 기제 없애… 두들겨 맞더라도 장기적 생명력 발휘하려는 선택

노무현 대통령은 4월1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취임 50일 소감을 ‘불안과 우울’로 요약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가지 평가를 종합해보면 국민의 정부가 겪은 과정을 비슷하게 걷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왜 그렇게 비극적으로 말하느냐’고 격려하려 하자 “격려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새로운) 문화의 싹이 눈보라에 묻힐 수도 있고, 기성의 사고와 문화에 짓밟힐 수도 있다. 제가 우울한 것은 이런 불안감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나 마구 치는 동네북이 될지라도

사진/ “가늘고 길게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요.”노무현 대통령은 정권 유지 차원의 권력기제를 제거하고 있다.(한겨레 이정용 기자)
그는 불안과 우울에 빠질 만도 하다. 야당과 언론, 시민단체가 들고일어나 그를 ‘동네북’치듯 하기 때문이다. 사실 노 대통령은 맞을 일을 했다. 서동구씨를 어물쩍 한국방송 사장에 앉히려 한 일과 아직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측근들의 돈 수수 추문도 불거졌다. 최근에는 북한-미국-중국 3자회담에 끼지 못한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물론 노 대통령이 잘한 일도 있다. 그러나 “노무현이 이건 잘했다”며 고개를 들었다가는 “넌 뭐냐”며 맞아죽을 듯한 게 요즘 분위기다. 어쨌든 그를 “더욱 두들겨패자”거나 아니면 “그만 패자”고 변호할 생각은 없다. 대통령이 되었으니 누구보다 행복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두들겨맞는다고 크게 억울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최근 ‘노무현 두들겨패기’에 김대중 정부 초기와 다른 시대적 코드가 깔려 있는 점은 주목해도 좋을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은 소수정권이며 비주류세력의 첫 집권임에도 취임 초기에 90% 이상의 여론 지지를 받았다. 이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아래서 강력한 리더십이 먹혀들었다는 환경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 차원에선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정보원과 검찰, 국세청 따위의 권력기관을 강력하게 틀어쥐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더욱이 사상 첫 정권교체에 따라 “생소한 사람들이 칼자루를 잡았다”는 점 때문에 ‘권력의 공포’ 효과는 한층 극대화됐다. 야당과 언론, 보수적 지식인 집단이 숨죽인 데는 이런 사정이 작용했다.

반면 노 대통령은 국정원과 경찰의 정치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검찰을 향해선 ‘청와대와 검찰이 제 갈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국세청은 특별세무조사가 없을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약속들이 지켜질지는 별도로 감시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는 전통적 정권유지 기제인 ‘권력의 공포’ 요소를 스스로 제거한 것이다.

말년의 식물인간 거부… 주어진 권한 행사

노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가 후반기 들어 ‘식물정권’으로 전락해간 과정에서 교훈을 얻었음 직하다. ‘대통령 사람들’을 통해 국정원과 검찰을 관리한 결과, 이들이 비리 게이트에 연루될 때마다 곧바로 정권 차원의 타격으로 비화한 김대중 정부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인 셈이다. 미국에서는 진작 권력기관과 정권의 ‘정치적’ 분리가 이뤄져 미 중앙정보국(CIA)이 무슨 사고를 쳐도 어디까지나 CIA 비리지 정권비리가 되진 않는다. 정권이 흔들리는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백악관과 대통령이 직접 개입한 경우뿐이다.

어쨌든 최근에는 노무현 정권의 향배를 둘러싸고 엇갈린 전망이 나온다. 초장부터 동네북이 되는 걸 보면 얼마 못 가 식물정권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견해와, ‘가늘더라도 길게 생명을 유지하지 않을까’(‘굵고 짧게’의 반대임)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노 대통령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다음날 한 워크숍에선 이렇게 말했다. “(어제) 엄살을 좀 떨었다…. 그러나 국민이 예상하는 인기바람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년 임기가 있다. 주어진 권한을 확실하게 행사할 것이다. 시작한 일이 다 무너지지 않고 1~2년 고생하면 국민도 이해할 것이다.” 이 발언을 보면 노 대통령이 ‘굵고 짧게’를 생각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겨레 정치부 박창식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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