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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포퓰리즘

‘을’을 배제하는 우파 포퓰리즘의 언어에 맞서 ‘갑’을 겨냥한 정치 언어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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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2-02-08 16:19 수정 : 2022-02-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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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진욱의 질문
포퓰리즘이란 말은 종종 비난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정치현상 중에는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힘이 내장됐을 때도 있다. 우리는 포퓰리즘의 어떤 긍정적 측면을 주목해야 할까? 어떻게 그 잠재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정치를 바꾸는 힘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윤석열은 포퓰리스트다. 누군가는 ‘이재명식 포퓰리즘’으로부터 대한민국 법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가 왜 포퓰리스트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는 김대중에서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리버럴 집권기를 거치며 극단적 우파들의 상징적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민주주의 모범국가의 ‘포퓰리스트 대선’
윤석열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2021년 11월을 전후해 거침없는 언행을 펼쳐왔다. 자영업자와 영세사업주 간담회에서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노동제의 무용함을 강변하더니, 20대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정서에 편승해 밑도 끝도 없는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던지고, 최근엔 ‘외국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요건 강화’를 약속하며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망언을 쏟아냈다. 경쟁 후보인 ‘원조 포퓰리스트’ 이재명까지 나서 “극우 포퓰리즘”이란 낙인을 찍어대니, 윤석열로선 억울함을 넘어 모욕감마저 느꼈던 모양이다. “희대의 선동가이자 포퓰리스트인 이재명”이 “(메시지의) 본말을 전도하고 있다”는 신경질적 논평으로 받아쳤다.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까지 성취한 아시아 모범국가의 대선 레이스에서 집권당과 제1야당의 유력 후보끼리 서로를 포퓰리스트라 낙인찍어 공방하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희극적이다. 하지만 ‘포퓰리스트 대선’은 21세기 한국 정치를 넘어 지구 정치 일반의 숙명이다. 지금은 행성 전체에 온갖 병적 징후가 창궐하는 정치적 대공위시대(Interregnum·인터레그넘)1, 포퓰리즘 국면(Populist Moment)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포퓰리즘을 특정 지역에 출몰하는 병리적 정치현상, 민주주의의 일탈로 보는 주류적 시각과 차이가 있다. 10여 년 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벤자민 아르디티의 포퓰리즘론을 접한 뒤 나는 그것이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불리는 소종파 운동과 닮은 점이 무척 많다고 생각했다.

장로교 목사 아들인 내게 기독교 신앙은 오랜 기간 사고의 바탕이자 정념 세계의 완강한 경계선으로 작용했는데, 거기엔 어릴 적 교회에서 접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영향을 미쳤다. 그 기억 속에 열 살 무렵 만난 주일학교 선생님이 있다. 그의 단골 레퍼토리는 산속 기도원에서 오랜 금식기도 끝에 접했다는 ‘십자가 신비체험’이었다. 공복의 고통을 견디며 신의 음성을 간구한 지 보름째 되던 날, 새벽 어스름에 등장한 흰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이는 나와 친구들 말고는 없었던 듯 얼마 안 가 그는 교회를 떠났다.

포퓰리즘, 종교적 이단 운동의 ‘정치적 쌍생아’
2년 전 ‘코로나19 대유행’의 진원지로 낙인찍혀 존립이 위태로워졌지만, 한동안 개신교계 소종파 ‘신천지’의 위세는 대단했다. 신비주의·종말론에 공격적 선교 마케팅을 결합한 그들이 ‘신도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자, 위기감을 느낀 주류 교단은 이단 대책기구를 꾸려 초교파적으로 대응했다. 물론 주류 교단이 배척한 소종파는 신천지가 처음은 아니었다. 1950~1960년대 전도관과 통일교가 그랬고, 지금은 주류 교단이 된 순복음교회 역시 1980년대까지도 집요한 이단 공세에 시달렸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고, 이 과정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당연히 주류 교단 등 교권세력의 견제가 집중됐고, 파문(이단 판정)과 대대적 추방 운동에 직면했다.

정치 세계의 포퓰리즘 역시 기성 권력으로부터 위험집단으로 불온시돼 집요한 배척을 받아왔다는 점에선 소종파 운동과 다를 바 없었다. 정당 질서(=공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며 엘리트와 특권층(=교권세력)을 적대시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 및 지도자와의 강한 일체감(=신비주의)과 사회경제적 모순의 근본적 해결(=종말론)을 강조한다는 점 등에서 포퓰리즘 운동은 소종파 운동의 ‘정치적 쌍생아’나 마찬가지였다.

이 유사성은 두 운동 모두 제도화(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되고 추방된 열정들에 존재론적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열정의 핵심 성분인 신비주의와 종말론처럼, 권력의 행사와 통제에 직접 개입하려는 인민의 정치적 열망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착을 위해선 적절한 제한과 통제가 불가피한데, 길들지 않는 리비도(성적 충동) 같은 이 열정들이 방치될 경우 체제 내부에 끊임없는 불안과 소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억압된 열정들은 작은 균열만 생겨도 제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 시기는 대체로 현행 질서의 권위와 통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경제적 혼란이 확산되는 이단의 창궐기, 정치적 포퓰리즘의 시간이다. 이런 포퓰리즘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기존의 동원과 대의 시스템이 누락하고 배제한 이들을 새로운 정치 주체로 복권한다는 점에서 정치를 혁신하고 민주주의를 풍요롭게 하는 긍정성도 함께 갖기 때문이다.

멕시코 정치학자 아르디티는 이런 맥락에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증상’으로 규정한다. 이때의 증상은 단순히 병의 징표가 아니다. 이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증상, 요컨대 자아(=제도적 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억압된 것들(=직접 통치를 향한 인민의 열망)이 무의식 형태로 잠재해 있다가 특정 계기(=지배 질서의 이완과 사회경제적 위기)를 만나면 꿈이나 말실수 등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리 표상(=포퓰리즘 운동)에 가깝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속하되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며,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다.

우파 판본 ‘윤석열 포퓰리즘’에도 일말의 긍정성이?
라클라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퓰리즘을 ‘정치적인 것’ 일반의 논리로 확장한다. 그가 볼 때 사회 안에는 행정적·제도적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다양한 요구(불만과 충동)가 존재하는데, 이 요구들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면 ‘지배 질서로부터 수용이 거부됐다’는 공통의 처지에 근거해 ‘등가 사슬’(평등한 연대의 고리)이 만들어진다. 포퓰리즘은 이 요구들을 묶어 ‘인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고 ‘특권세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경계(전선)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실천이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사회 안에 분리된 채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의 불만과 요구를 ‘포괄적 상징이나 기표’(이념이나 가치, 지도자의 이름)로 묶어냄으로써 낡은 헤게모니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주체(인민)와 다수 의지(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담론 전략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포퓰리즘엔 우파의 판본과 좌파의 판본이 모두 존재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실천이 해방과 정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한 그것은 항상 긍정적 요소를 포함한다고 봐야 옳다. 윤석열의 포퓰리즘도 예외는 아니다.

대선 국면에서 윤석열이란 인물을 구심 삼아 작동하는 포퓰리즘은 명백하게 우파의 판본이다. 그것이 강조하는 건 공정과 상식, 자유민주주의(법치)의 회복인데, 하나같이 문재인 정부가 결핍했거나 배반했던 ‘공백’과 ‘결손’의 지점을 겨냥한다. 윤석열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를 두 진영으로 분할한다. ‘국민’ 대 ‘약탈세력’이다. 약탈세력은 리버럴 성향의 86세대 정치인과 친문재인 세력,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정규직 노조, 페미니스트, 진보 시민단체, 성소수자와 이주노동자 등 윤석열과 주변 세력이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대상이다. 윤석열의 포퓰리즘은 이 약탈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를 ‘국민’으로 호명한다. 고액납세자, 자산계급, 극우 노인층, 20~30대 남성, 전통적 보수유권자, 양극화로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 등이다.

이들은 노인과 전통 보수층에는 북한과 좌파 정치세력을, 20~30대 남성 등 사회경제적 좌절을 겪은 집단에는 정규직 노조와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를, 종합부동산세와 고액 재산세 납부자에겐 무능하면서 위선적인 86세대 리버럴 엘리트를 대립시켜 지지를 구축한다. 이 전략은 곳곳에서 가시적 성공을 거뒀으며, 그 성공에 비례해 우파 포퓰리즘 세력의 집권 전망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5년짜리’ 청와대 권력의 향배보다 중요한 것
이 상황을 낙관으로 가득 찼던 5년 전과 비교하면 어떤가. 2016년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냉전 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낡은 지역 구도와 결합해 만들어진 우파 헤게모니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의회와 정당정치가 리버럴 내 소수 강경파에 휘둘리자 실망한 연합세력 일부가 이탈 조짐을 보이더니, 2019년 조국 사태를 겪으며 구체제를 붕괴시킨 ‘촛불 동맹’이란 이름의 포퓰리스트 연합은 정치적 파탄을 맞았다. 여기에 부동산값 폭등과 경제 양극화라는 집권세력의 통치 실패, 여당 소속 광역단체장의 잇따른 성추문 낙마, 파국으로 치달아간 검찰개혁 갈등까지 겹치면서 여론 지형은 2021년 4월 재보선을 전후해 정권심판론이 우세한 구도로 재편되고 말았다.

‘반기득권 포퓰리스트 연합’의 붕괴로 만들어진 공백지대로 윤석열·이준석의 우파 포퓰리스트 기획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윤석열 세력의 무능을 부각하거나 그 지지자들을 비합리적이고 충동적 열정에 사로잡힌 집단으로 규정지어 윤리적·정치적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현상을 타개하기보다 상대 진영의 반발과 국민 사이에 감정의 골만 깊게 할 공산이 큰 탓이다.

관건은 배외주의와 소수자 혐오, 민주화 전통과 민주적 가치에 대한 조롱으로 분출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불안과 불만, 변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의 가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게 정교한 담론적·정치적 개입 전략을 구축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때 중요한 게 익숙한 기존의 해석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대중의 정치적 선택은 항상 현실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5년짜리 청와대 권력의 향배에만 관심 쏟을 상황이 아니다.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기는 ‘을’들의 좌절감과 정치적 인정 욕망이 같은 처지의 ‘을’들을 향한 배제와 혐오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위기에 책임 있는 ‘갑’들을 직접 겨냥하는 정치 언어로 분출되게 해야 한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윤석열의 포퓰리즘과 다른 형태의, 더 많은 포퓰리즘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게 스스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쉽고, 불가능하고, 어렵고, 그래서 더더욱 해볼 만한 일이다.”(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여인의 초상’ 중에서)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

1. 대공위시대는 최고 권력의 궐위상태를 일컫는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는” 위기의 시간을 정치적 대공위시대(인터레그넘)로 표현하면서 이런 시기에는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한다고 짚었다.

이세영의 질문
세대정치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공공연히 2030세대와 60대 이상의 세대포위를 대선 ‘승리 전략’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세대가 과연 정치사회적 선호의 표출에서 유효한 분석단위가 될 수 있을까.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제1401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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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