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5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법인 거대기업들은 마천루 사옥 꼭대기 층에 있는 임원실(지휘사령부)에서 이사회를 개최한다. 다소 비밀스런 이 사령부는 흔히 ‘위대한 방’으로 불린다. 지난 150여 년간 기업을 지배해온 핵심 시장원리인 ‘수확 체감의 법칙’이 더 이상 관철되지 않는, 경이로운 ‘신경제’ 세계가 정보기술(IT) 산업 확산과 함께 도래했다는 1990년대 이후, 이 방을 중심으로 전례없는 규모의 금융 사기가 판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대형 회계법인들은 그들의 고객(거대기업)과 짜고 회계 조작을 일삼았다. 수지맞는 일감을 따낼 수만 있다면 기업 쪽의 농간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주면서 곳곳에서 사기가 창궐했다. 창 바깥으로 하늘만 보이는 위대한 방의 회의 테이블에 놓인 몇 장의 짤막한 보고서는 ‘단기간에 (더 정확히는 오늘 당장, 또는 이번주나 이번 분기에) 주가를 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굵은 글씨에 밑줄을 긋고 있다. ‘무슨 짓’의 목록 맨 윗자리는 회계장부 날조, 저임금 비정규직 확대, 인력 감축, 외주화를 통한 비용 감축 등이 차지하고 있다. 단기 수익을 내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인내심 있는 장기 투자’를 부르짖다가는 회의실에서 쫓겨날 거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주가가 올라야 내 자리도 보전된다. 내게 부여된 스톡옵션이 연봉의 몇십 배인가?’ 이것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임원들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노동자들도 단기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의 지배 원리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잘리기 전에 더 일해 벌어먹어야 한다. 내 일자리를 지키려면 더 많은 비정규직을 써야 한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장시간 노동은 더욱 고착화된다. 우리는 ‘나쁜 행위’에 엄청난 유인을 제공하는 거대기업 체제를 갖고 있다. 지난 번영의 시대에 거대한 ‘제조’기업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물품을 효율적으로 생산·공급하면서 국민 경제의 성장과 고용을 책임지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법인기업은 꼭대기 층에 앉아 자신을 지휘하는 ‘금융’이란 주술에 걸려 휘둘리고 있다. 시장의 정직성에 대한 믿음은 깨졌다. 거대기업은 국회의사당 주변에 사무실을 내고 정치헌금을 뿌려가며 정부를 설득하고 때로는 정부에 지시를 내리기까지 한다. 사실상 국가 통치에 참가하고 있다. 거대기업들이 다시 ‘번영의 불씨’로 작동할 수 있도록 누가 유도할 것인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조계완의 시장 딴죽 걸기’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