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지 않은 때에 찾아오는 생식세포의 생산 중단이 다른 포유류에서도 관찰된다. ‘할머니 가설’이 포유류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할머니. 류우종 기자
배란 이후 더 커지는 생식적 격차
생물 진화에서 1억5천만 년쯤 전에 일어난 포유류의 탄생에는 독특한 지점이 있습니다. 유성생식을 하는 대부분의 동물은, 암컷과 수컷의 생식에의 투자 비율이 원래 약간 불균형합니다. 개체의 최초 형태인 알은 암컷의 난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죠. 닭을 예로 들어볼까요? 암탉은 수컷과의 교미가 없이도 생후 20주쯤 되면 알을 낳기 시작합니다. 이때 수컷과 접촉이 있으면 유정란을, 그렇지 않으면 무정란을 낳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며, 유정란이든 무정란이든 달걀 자체의 크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정자는 매우 작습니다. 정액 1㎖ 안에 수십억 개 들어갈 정도니까요. 달걀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암탉의 월령과 체구일 뿐입니다. 이처럼 유성생식으로 번식하는 대부분의 동물에게, 암컷은 더 큰 생식세포를 더 적게 만들고, 수컷은 더 작은 생식세포를 더 많이 만들지만, 전자의 생식세포 투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체외수정을 하는 물고기의 경우 커다란 난자(알)를 많이 만들어내야 하는 암컷이 수컷에 견줘 덩치가 더 크기도 하고, 심지어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로 유명한 흰동가리는 무리 내 암컷이 죽으면 가장 덩치가 큰 수컷이 암컷이 되어 알을 낳기도 합니다. 포유류 역시 암컷은 커다란 난자를, 수컷은 작은 정자를 만드는 기본 공식은 그대로 따릅니다. 사람만 해도 여성의 난자는 약 100~150㎛로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크지만, 정자는 폭 2~4㎛, 길이 40~50㎛에 불과합니다. 다만 여성은 한 달에 한 번, 한 개의 난자만을 만들어내지만, 남성은 하루에도 1억 개 정도의 정자를 만들어낸다는 차이가 있으니 생식세포의 전체 질량만을 본다면 오히려 남성 쪽의 투자가 많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난자(알)를 만들어 몸 밖으로 배출하면 더 이상 생식적 투자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다른 동물과 달리, 포유류의 경우 암컷은 배란 이후 생식적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집니다. 암컷은 배란 이후 수정된 난자를 자궁에 착상시켜 임신 기간 내내 영양분과 격리된 보호 공간을 제공해야 하고, 출산으로 알보다 더 큰 새끼를 낳는 불편함을 견뎌야 하며, 결정적으로 출산 이후에도 일정 기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데 필요한 추가 자원을 제공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까지 집니다. 알을 낳는 포유류인 단공류나, 임신 기간이 매우 짧고 아주 작은 새끼를 낳기에 출산의 어려움이 거의 없는 유대류의 경우에도, 초기 갓난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돌보는 모성 투자의 기간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유전물질을 후대에게 전달하는 비율은 암수가 동일하다는 것에 견주면, 생식학적 투자의 균형추는 지나치게 암컷 쪽으로 기운 감이 있습니다. 어미의 모성 돌봄을 유도하는 젖분비 기능의 진화는, 새끼들의 생존 가능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구실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다른 동물에 견줘 훨씬 적은 수의 새끼를 낳지만, 그 새끼들이 생존해 성체가 되는 비율은 다른 동물보다 높습니다. 더 많이 투자하지만 더 높은 생존율을 보이는 고투자 고효율의 사례가 바로 포유류인 셈인데, 그 부담의 대부분이 암컷에게 편중된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 여성만이 폐경을 겪는다?
포유류 생태에서 인간 여성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폐경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이 그렇듯, 인간의 아이들도 어린 시절에는 생식능력이 미숙한 채 태어나며, 사춘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성적 성숙이 일어납니다. 일단 성적으로 성숙하면, 남성은 정자 생성이 평생 가능하지만(물론 나이 들면 그 양이 현저히 줄어들긴 합니다), 여성은 일정 나이가 지나면 난자 생산이 완전히 중단됩니다. 실제 원인은 난소 기능 저하에 따른 배란 중단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증상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던 월경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이를 ‘폐경’(완경)이라고 하지요.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수명은 86.5살이며, 평균 폐경 연령은 49.7살입니다. 보통 12~13살에 초경이 나타나므로,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여성의 인생에서 가임력을 가지는 시기(월경기)와 가임력이 사라지는 시기(폐경 이후)의 기간은 거의 엇비슷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할머니 가설’이 등장합니다. 인간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과 수유라는 포유류 암컷이 지닌 기본적인 세 가지 부담에, 직립보행으로 인한 자궁·골반 구조의 변화, 뇌 발달로 머리가 큰 태아, 생후 1년이 돼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느린 성장 속도를 보이는 미숙한 어린 개체라는 세 가지 부담이 추가됩니다. 따라서 인간 여성의 경우 노년기가 되어 신체 활력이 떨어지는 기간이 되면, 아이를 더 낳아 어머니가 되기보다는, 출산을 중단하고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유전자 존속에 더 유리한 행위가 됩니다. 개체의 생존과 번성에 도움이 되는 행위라면, 무엇이 됐든 자연은 그 행위를 선택합니다. 그러니 인간 여성에게는 생식능력이 없는 개체가 상당히 오래 살아남는, 심지어 끝까지 생식능력을 유지하는 남성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특징이 진화된 것이죠.생식능력이 사라진 뒤에도 상당 기간 생존하는 폐경 현상은 인간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특성으로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정도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많은 암컷 포유류에게 최대 생존 나이보다 이전에 생식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관찰됩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암컷 포유류에게서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배란 주기의 상실, 난자·난포의 고갈, 난자 질의 저하, 자궁 내 상태 악화,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는 내분비계 기능 상실 등이 흔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최대 수명 2년 쥐도 17개월에 배란 사라져
과학자들은 실험용 생쥐를 이용해 암컷 포유류의 생식계 노화 형태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실험실에서 키우는 생쥐의 최대 수명은 약 2년으로, 생후 2개월이면 성적으로 성숙해 새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생쥐의 일생을 분류해보면, 생후 2~8개월을 청년기, 8개월 이후를 중년기, 17개월 이후를 노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배란 주기 동안 짝짓기를 해 임신한 암컷은 21일간의 임신 기간을 거쳐 6~12마리의 새끼를 낳아 2~4주간 젖을 먹입니다. 젖을 뗀 암컷 생쥐는 빠르게 성숙해, 생후 2개월이 되면 번식이 가능해집니다. 성적 성숙은 뇌에 있는 시상하부에서 시작됩니다. 개체가 어느 정도 자라 번식이 가능한 신체 상태를 갖추면, 지금까지 뇌의 시상하부에서 분비돼 생식계의 성숙을 억제하던 물질이 사라지면서, 뇌하수체가 제 기능을 시작해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이 분비됩니다. FSH는 난소를 자극해 난자의 배란을 유도하고, LH는 난자를 둘러싼 난포를 황체로 발달시켜 임신 기간을 안정화하는 황체호르몬을 생성하도록 돕습니다. 이후 암컷 생쥐의 뇌하수체에서는 FSH와 LH가 일정한 주기로 분비되고, 이에 따라 임신하지 않은 암컷 생쥐는 6~10일 주기로 배란을 반복하며 발정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암컷 생쥐가 8개월이 넘어 중년기에 들어서면, 다른 신체 기관의 노화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시기임에도,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FSH와 LH의 분비 시기와 양이 줄어 점차 배란 주기가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노년기인 17개월을 넘어서면 생식 주기가 더는 관찰되지 않습니다. 인간 여성의 경우만큼 길지는 않아도, 암컷 생쥐 역시 생애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생식능력이 거의 사라지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죠. 다만 자연상에선 나이 든 암컷의 생식능력 중단 현상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연 상태에선 한계수명까지 살아남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죠. 수컷에 비해 생식능력 노화가 빠른 암컷
포유류 암컷에게는 수컷에 비해 생식능력 노화가 빨리 찾아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정말 그렇게 부정적인 걸까요. 영국의 역사학자 팻 테인은 저서 <노년의 역사>에서 늙음이란 ‘스스로 생활할 능력, 생존을 지킬 능력이 더는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 말합니다. 필연 언젠가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겠지요. 번식의 생물학적 부담이 큰 인간 여성에게는 노년이 되기 전에 폐경이 일어나는 것이, 자신을 건사하기 힘든 진짜 늙음의 순간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기 전에 이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주는 일종의 보상휴가가 아닐는지요.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이은희의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하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