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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막걸리] 아지매를 위하여… 벌컥벌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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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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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와 공짜안주, 그리고 어여쁜 여주인의 추억… 이제는 푸른 시절의 언약만 남아

성인이 되어 내가 처음 가본 술집은 고향 쇠전거리에 있는 선술집이었다. 무슨 옥호가 있었던 같지는 않은데 우리는 그 집을 ‘아지매집’으로 불렀다. 우리란 대학입시를 치르고 각자 당락의 행운과 아픔을 가슴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떠꺼머리 총각 일당을 이른다. ‘아지매집’의 아지매는 아줌마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이니 그 집에는 당연히 아지매가, 그것도 보통의 아지매가 아니라 어여쁜 아지매가 있었다. 주인 겸 종업원, 주방장인 그 아지매는 갓 서른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그 술집이 처음 해보는 장사인 듯, 꽃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두르고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은 대로 수줍어했고 적으면 적은 대로 근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양이면 우리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도 저리도 젊고 아리따운 아낙네로 하여금 우시장 장꾼들이 풀방구리마냥 드나드는 골목에 술집을 낼 수밖에 없게끔 한 낯짝 모를 남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분노와 두근거림을 연료로 삼아 우리는 거의 매일 네댓명씩 작당해 그 술집을 드나들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아지매집의 술은 막걸리밖에 없었다. 술집 바닥을 깊게 파서 그 안에 한 섬은 족히 들어갈 큰 장독을 묻고 거기에 배달된 막걸리를 보관해두었다가 손님이 주문하면 국자로 퍼서 주전자에 담아 날라다 주었다. 기껏 탁자 네댓개밖에 되지 않는 공간이니 손님이 와보아야 하루 저녁에 그 독의 술을 다 비울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 집에는 부엌이 따로 없었고 안주는 아지매가 집에서 만들어오는 게 분명했다. 벽 한쪽에 안주를 종류별로 비닐통에 담아놓고 손님이 새로 오면 작은 접시에 그것들을 나누어서 주었다. 조그마한 접시들은 아지매의 생김새처럼 희고 청결했고, 접시의 내용물이 다 떨어지면 얼마든지 더 보충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주는 공짜였다! 우리처럼 술과 안주를 동시에 사먹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단골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안주를 설명해보려니 다시 가슴이 아려진다.

우선 고구마의 껍질을 깎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설탕물에 잠기게 하여 변색을 막은 것. 이름 붙이자면 ‘썬 날고구마’. 쥐포를 채 썰고 거기에 고추장과 물엿을 더한 뒤 손으로 버무린 것, ‘매운 쥐포채’. 검은콩에 멸치를 더해 간장으로 졸인 콩자반. 그리고 무채가 있었다. 우리들로서는 아지매의 손바닥만한 접시에 담겨나오는 그 안주들이 양에 찰 리 없어서 네댓번씩 ‘리필’을 하곤 했으니, 아지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런 우리를 미소로 바라보곤 하였다.

문제는 우리만 막걸리를 마시는 게 아니라는 데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수십년 동안 저잣거리를 지배해오던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 집에 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들이 들어오면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고 그러면 우리 모두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때부터 아들들은 살얼음판 위에 놓인 밥통 같은 기분이 되어서, 없는 돈 모아 술 마시러 와서 이게 무슨 꼴인가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종내 일찍 일어서게 마련이었다. 그런 날에는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 되는 녀석을 불러내어 귀를 틀어쥐고, 빨리 너희 아버지 끌고 가라고 윽박지르기도 했고 그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게 틀림없는 돈으로 다른 집에서 술을 사게도 했지만 우리 아지매가 없는 술자리, 우리 아지매가 직접 만든 공짜 안주가 없는 술이 뭐가 그리 맛있겠는가.

아버지들이 벌건 눈에 취한 목소리로 아지매의 손이라도 잡으려고 수작을 거는 못 볼 꼴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빨리 진짜 술꾼, 진짜 어른이 되어 아지매를, 이 수준이 낮아 지옥 같은 곳에서 구출해내자고 언약하게 되었던 바, 그 술집은 1년이 채 안 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고 한다.


세월은 가고 이제 청년들의 언약만 남아 있다. 살균하지 않은, 잘 빚어진 막걸리에는 푸른 시절 그 언약의 새콤한 맛이 들어 있다.

성석제 | 소설가

* 이번호부터 소설가 성석제씨가 먹을거리에 대한 단상, 추억 등을 담은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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