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광화문 어느 부대찌개집…그 칼칼한 맛은 역사도 부대도 잊게 만들었다
성석제/ 소설가
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게 부대찌개다. 좀 잊을 만하면 미군부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고, 또 잊을 만하면 누가 먹다 버린 걸 공급하다가 어떻게 됐다느니 말았다느니 한다. 부대찌개만큼 한반도에 미군이 진주한 이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찌개가, 아니 음식이 있을까. 그런데 이 역사적인 부대찌개를 내가 처음 먹은 곳은 미군부대 근처가 아니라 서울 광화문이었다. 하긴 거기도 미국 비자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늘 담 밖에서 줄을 서 있는 미대사관이 있고 보면, 또 미대사관을 지키는 전경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언제나 줄을 지어 서 있고 보면 미군부대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최초로 먹었던 부대찌개는 광화문하고도 종합청사 뒤에 있는 건물 지하에 있던 식당의 부대찌개였다.
식당의 이름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부대찌개집’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때는 1988년 초, 그 건물 8층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서 난생처음 먹는 불갈비에 소주가 아닌 맥주로 잔을 채우고 건배를 외치는 신입사원 환영회식에서부터 넋이 나가, 여기가 지상천국이니 여기서 일생을 마치자는 다짐을 하루에도 서너번씩 하던 때였다. 매일 불갈비만 먹을 수 없고 점심까지 불갈비를 먹을 수는 없어서 주변 식당에서 적당한 메뉴를 찾아 헤매다니는 게 점심시간의 일과였지만, 부대를 통째 넣어서 끓이는 것도 아니면서 부대찌개라는 웃기는 이름을 단 서민적인 음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부대찌개집 앞에 점심시간이면 언제나 길게 늘어선 줄은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점심시간을 30분 이상 지나서 도저히 시간에 맞춰 먹을 가능성이 없다 싶을 때에야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는 사람들이 회사에 몇년 이상 근무한 고참이라는 걸 알고는 슬슬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내가 속한 부서가 사람들이 몇 안 되었고 부서 책임자가 맛있는 음식이라면 남 먼저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던 고로 별다른 노력 없이 그 부대찌개를 맛보게 되었다. 줄을 안 서도 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점심시간보다 30분쯤 일찍, 또는 점심시간이 30분쯤 지난 다음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처음 부서장의 지휘, 인솔하에 부대찌개집에 이르른 날은 봄날하고도 변덕스럽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어느 날 오후 1시 반이었다. 문간에 있는 그 식당은 그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 중 가장 좁았다. 벽에 기다란 선반을 달아 식탁으로 쓰고 있었고, 그 앞에 동그란 간이의자를 여남은개 놓았으며, 탁자가 세개쯤 되는 좁다란 공간이 다였다. 식당 안쪽 부엌에는 수십개의 양은냄비가 이미 깨끗하게 씻겨서 겹쳐져 있었다. 그 양은냄비 가운데 제일 작은 것이 1인분에 해당했고, 그날 각자 하나씩의 냄비를 맡음으로써 각자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숟가락을 한 냄비에 번갈아 담그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같은 부대에 속해 있어도 부대원들이 각자의 식판에 음식을 담아 먹듯이. 멸치 육수를 냄비 바닥에 얌전하게 붓고 소시지 몇 토막에 햄 약간, 갈아낸 스테이크 약간에 통조림콩, 슬라이스 치즈, 김치를 넣은 것이 부대찌개 한 냄비였다. 그 위에 고춧가루와 파, 양파 등속의 웃기가 더해졌다. 결정적으로 그 부대찌개를 다른 부대찌개와 구별짓게 하는 건 당면이었다. 미리 삶아놓았다가 부대찌개가 끓을 때 넣어주는 그 당면은 젓가락 사이를 흘러내릴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찰졌다. 그 당면은 대전에서인가 일부러 주문을 해서 받아쓴다고 했다. 그것으로도 양이 모자라면 라면을 반토막 정도 넣어서 먹었다. 그 맛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앞치마를 두른 여주인의 생김새처럼 깔끔하고 칼칼하고 개운했다. 그 부대찌개의 맛이 얼마나 자기 완결적인지, 역사도 부대도 부서도 숯불갈비도 잊어버리게 만들곤 했다. 좀 잊을 만하면 부대찌개가 생각난다. 봄날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바쁜 일도 없이 바쁘게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녁나절 문득 부대찌개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결국 세번에 한번꼴은 지난해 미국 살다 다니러 온 이가 ‘정크푸드’라고 이름 붙인 부대찌개를 먹게 된다. 물론 옛날의 그 맛은 다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당시 그 건물에서는 그 부대찌개를 먹는 게 ‘웰빙’이었다. 지금 문득 그 식당의 주인은 어디 가서도 ‘통하고’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정은
마침 내가 속한 부서가 사람들이 몇 안 되었고 부서 책임자가 맛있는 음식이라면 남 먼저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던 고로 별다른 노력 없이 그 부대찌개를 맛보게 되었다. 줄을 안 서도 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점심시간보다 30분쯤 일찍, 또는 점심시간이 30분쯤 지난 다음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처음 부서장의 지휘, 인솔하에 부대찌개집에 이르른 날은 봄날하고도 변덕스럽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어느 날 오후 1시 반이었다. 문간에 있는 그 식당은 그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 중 가장 좁았다. 벽에 기다란 선반을 달아 식탁으로 쓰고 있었고, 그 앞에 동그란 간이의자를 여남은개 놓았으며, 탁자가 세개쯤 되는 좁다란 공간이 다였다. 식당 안쪽 부엌에는 수십개의 양은냄비가 이미 깨끗하게 씻겨서 겹쳐져 있었다. 그 양은냄비 가운데 제일 작은 것이 1인분에 해당했고, 그날 각자 하나씩의 냄비를 맡음으로써 각자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숟가락을 한 냄비에 번갈아 담그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같은 부대에 속해 있어도 부대원들이 각자의 식판에 음식을 담아 먹듯이. 멸치 육수를 냄비 바닥에 얌전하게 붓고 소시지 몇 토막에 햄 약간, 갈아낸 스테이크 약간에 통조림콩, 슬라이스 치즈, 김치를 넣은 것이 부대찌개 한 냄비였다. 그 위에 고춧가루와 파, 양파 등속의 웃기가 더해졌다. 결정적으로 그 부대찌개를 다른 부대찌개와 구별짓게 하는 건 당면이었다. 미리 삶아놓았다가 부대찌개가 끓을 때 넣어주는 그 당면은 젓가락 사이를 흘러내릴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찰졌다. 그 당면은 대전에서인가 일부러 주문을 해서 받아쓴다고 했다. 그것으로도 양이 모자라면 라면을 반토막 정도 넣어서 먹었다. 그 맛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앞치마를 두른 여주인의 생김새처럼 깔끔하고 칼칼하고 개운했다. 그 부대찌개의 맛이 얼마나 자기 완결적인지, 역사도 부대도 부서도 숯불갈비도 잊어버리게 만들곤 했다. 좀 잊을 만하면 부대찌개가 생각난다. 봄날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바쁜 일도 없이 바쁘게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녁나절 문득 부대찌개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결국 세번에 한번꼴은 지난해 미국 살다 다니러 온 이가 ‘정크푸드’라고 이름 붙인 부대찌개를 먹게 된다. 물론 옛날의 그 맛은 다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당시 그 건물에서는 그 부대찌개를 먹는 게 ‘웰빙’이었다. 지금 문득 그 식당의 주인은 어디 가서도 ‘통하고’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