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섭의 색정만가 | 피어싱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몸치장 방식으로 떠올라… 닫힌 사회에서 개인의 열정 드러내는 소통의 도구
얼마 전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간편한 복장으로 의원선서를 하려다가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고 그 간단한 요식행위를 하루 미뤄야 했던 일이 국회에서 일어났다. 그때 각종 매체에서는 이 문제를 이러쿵저러쿵 다루면서 의미가 있다거나 지나쳤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잔치를 푸짐하게 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다른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사람살이가 원래 그렇다. 또래 집단에서는 좀더 강도 높게 외형의 동질화를 요구하면서 다른 집단과의 차이점을 유지하며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살이가 원래 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심각해지고 나서야 이기주의라거나 님비현상이라고 사태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제각각 제 모습을 하고 살아가도 어느 누구도 무어라 트집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삶이다.
허영에 들떠 살아가는 사람들의 증거 옷차림 하나로 난리치는 판국에 몸의 다름에 대해서는 얼마나 강짜를 심하게 부릴까? 문신에 대한 일방적인 선입관이 그렇고 신체장애에 대한 편견과 일정한 무관심은 더욱 심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피어싱에 대해서도 찬반토론식의 논란이 뜨겁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엄청난 돈을 쓰면서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싶어하고, 어떤 직업군에서는 감색 정장에 넥타이를 매어야만 한다고 유니폼 같은 치장 방식까지 결의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이면이다. 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며 허영은 모든 인간적인 것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정장 차림의 양복입기와 조직폭력배들이 주창하는 등판의 용무늬는 같은 허영의 산물이다. 그들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허영에 들떠 살기는 매일반인 것이다. 허영에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은 그래서 실체가 없다. 짙은 감색 정장이 국회의원이고 용무늬 문신이 곧 조직폭력배라면, 우리가 이 이상한 등식이 맞다고 맞장구친다면, 우리의 생활은 진짜로 실체 없는 부유하는 삶이 된다. 그 부유하는 삶 속에서 젊은이들이 찾아낸 몸치장 방식 중 하나가 피어싱이다. 이제 피어싱은 어떤 또래 집단의 상징이 되었고, 그들 또한 국회의원이나 조폭처럼 하나의 등식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의 실체로 등장하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피어싱은 그들을 하나씩 불러 익명성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집단의 실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존재의 방식이 되었다. 허영은 더욱 큰 허영으로 치닫는 데 매력이 있다. 크게 욕지거리하는 국회의원과 더 악랄한 싸움판을 벌여야 하는 조직폭력배가 지향하는 허영은 같다. 그래서 그들은 늘 조금씩 더 진하게 허영심을 내비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꽤 매력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더 과감한 장소를 몸 안에서 찾아낸다. 조금씩 더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장신구를 뚫린 몸에 걸어둔다. 매일 조금씩 커지는 허영의 매력을 쉽게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매력을 통해 허영을 즐기는 것이다.
허영의 몽환적 실재감 적나라하게 표현
이 세 그룹은 몸을 통해(사실 국회의원이라는 그룹은 이 중에서 가장 몸을 원시적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몸의 실재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다른 두 그룹은 몸의 진정성을 알고 있다. 한 그룹은 그 진정성이 폭력으로 드러나고 다른 한 그룹은 자신만을 가해함으로써 평화적으로 몸을 사용한다) 허영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에서 허영의 몽환적 실재감을 가장 잘 표현하는 그룹은 피어싱을 즐기는 쪽이다. 왜냐하면 국회의원이 국회의원답다고 여기는 복장에 매달리고 폭력배가 조직폭력배다운 문신을 몸에 새겨야 하는 데 비해 피어싱은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데서 그 허영이 정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의 몸으로 실재감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피어싱 방법이 정직하고 정확한 허영의 척도가 된다.
피어싱을 즐기는 일단의 집단이 생기는 이유를 우리는 삶의 방식이 허무한 양식 위에 놓여져 정형화되어가는 사회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영웅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거나 영웅을 불러낼 만한 비극이 사라진, 삶의 비애가 녹아 있다. 현대사회라고 부르는 이 시공간은 삶이 규격화되어 있고 생활이 하나의 지향성으로 닮아가는 사회이며 그 삶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이 딱 끊긴 사회다. 습관이 힘이 점점 더 강력한 도덕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허영심뿐이다.
소비를 전제로 하는 허영 또한 안전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본연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기에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이 허영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피어싱의 건강함은 사회의 닫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자신의 열정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두 가지 쟁점은 남아 있다. 그것이 창조적인 행위인가 하는 문제와 삶의 실재성을 이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려면 습관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약 피어싱이 유행에 그친다면, 그래서 그 형식의 명료함이 몸에 대한 인식방법으로 안착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면 우리는 허영의 개인적 견해 정도로 피어싱을 이해해야 한다. 습관의 힘을 믿는다면, 피어싱은 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다. 어찌 알겠는가. 혓바닥에 피어싱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기 힘들고 의원선서도 받아주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될지.
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수도
몸에 대한 여러 편견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피어싱은 그 자체로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또한 이 특이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집단화되어 있는 허영은 너무도 평화적이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몸에 대한 인식에서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굳이 사족을 달아 피어싱에 소망을 하나 걸어본다면 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몸에 대한 환상을 이 거친 허영의 방식에서도 함께 고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섭 |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사진/ 〈수정할까요 #21〉(염중호 작, 2003).
허영에 들떠 살아가는 사람들의 증거 옷차림 하나로 난리치는 판국에 몸의 다름에 대해서는 얼마나 강짜를 심하게 부릴까? 문신에 대한 일방적인 선입관이 그렇고 신체장애에 대한 편견과 일정한 무관심은 더욱 심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피어싱에 대해서도 찬반토론식의 논란이 뜨겁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엄청난 돈을 쓰면서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싶어하고, 어떤 직업군에서는 감색 정장에 넥타이를 매어야만 한다고 유니폼 같은 치장 방식까지 결의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이면이다. 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며 허영은 모든 인간적인 것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정장 차림의 양복입기와 조직폭력배들이 주창하는 등판의 용무늬는 같은 허영의 산물이다. 그들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허영에 들떠 살기는 매일반인 것이다. 허영에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은 그래서 실체가 없다. 짙은 감색 정장이 국회의원이고 용무늬 문신이 곧 조직폭력배라면, 우리가 이 이상한 등식이 맞다고 맞장구친다면, 우리의 생활은 진짜로 실체 없는 부유하는 삶이 된다. 그 부유하는 삶 속에서 젊은이들이 찾아낸 몸치장 방식 중 하나가 피어싱이다. 이제 피어싱은 어떤 또래 집단의 상징이 되었고, 그들 또한 국회의원이나 조폭처럼 하나의 등식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의 실체로 등장하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피어싱은 그들을 하나씩 불러 익명성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집단의 실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존재의 방식이 되었다. 허영은 더욱 큰 허영으로 치닫는 데 매력이 있다. 크게 욕지거리하는 국회의원과 더 악랄한 싸움판을 벌여야 하는 조직폭력배가 지향하는 허영은 같다. 그래서 그들은 늘 조금씩 더 진하게 허영심을 내비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꽤 매력 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더 과감한 장소를 몸 안에서 찾아낸다. 조금씩 더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장신구를 뚫린 몸에 걸어둔다. 매일 조금씩 커지는 허영의 매력을 쉽게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매력을 통해 허영을 즐기는 것이다.

사진/ 〈수정할까요 #21〉(염중호 작, 2003).

사진/ 〈수정할까요 #21〉(염중호 작,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