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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신은 빠른가?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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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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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속도

내 몸을 관장하는 사회적 잣대 위에서만 조절돼 온 내 몸의 속도

사람은 제 몸의 한계 안에서 살기 마련이다.

멀리 뛰고 싶어도 멀리 뛸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더 높이 차고 오르고 싶어도 폴짝거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 몸이 가져다준 한계를 몸으로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늘을 날고 싶어하고 물 밑 아득한 곳까지 헤집으며 다니고 싶어한다. 우리 몸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자 기계를 고안해냈다.


속도에 대한 남성적 시각

우리 모두 가장 뛰어넘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 ‘빠르기’에 대한 몸의 한계일 것이다. 우리는 늘 몸이 가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려 하고 움직이며 살고 있다. 빠르기에 대한 욕망은 단순하게 거리상의 수치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속도에 무한한 신뢰를 보이기까지 하면서 근대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그래서 꼭지점에서 다른 꼭지점으로 이행하는 속도를 넘어가려다 덜컹 생겨버린 ‘속도의 문제’다. 이제 우리는 제 마음속에서조차 거두지 못하는 속도의 쾌감에 조금씩 질식해가고 있다.

속도란 일정한 좌표 사이를 빠르거나 느리게 도달하여 생기는 시간의 개념이다. 우리는 속도에 대해 몸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한계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다. 최소한 싫어한다. 단, 몸이 가지는 속도에 대한 이분법적 선호가 유일하게 있는데, 그것은 경제 개념이 개입될 경우와 성욕이 개입되는 경우에서 그렇다. 서울∼부산을 두 시간 안팎으로 도달하기를 바라면서도 남녀간의 성행위에서는 지나치게 더디고 지루하게 오랫동안 속도가 느려지기를 바란다. 사실 인간의 섹스는 몸의 절정이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절정의 한순간만 머리 속에 그리곤 그 과정을 쉽게 간과한다. 그래서 삽입성교의 지속성만을 성교의 절대성처럼 믿고 마는 것이다. 그 판단의 사이에는 촘촘하게 남성의 마초 지향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서울∼부산을 몇 시간 안에 절대로 주파할 수 없듯이 성행위 또한 어느 영화처럼 오래 할 수 없다. 이 이율배반적인 속도의 선호도는 물론 물신의 대상이 된 몸으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물신의 진정한 주인이기를 주장하는 남성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속도에 대한 호불호와 그 가치매김의 방식은 물신으로 위장하거나 포장될 만한 남성적 시각이 개입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빠르기가 자랑인 스포츠카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 늘씬하게 빠진(공기저항을 계산한 디자인의 산물임에도) 스포츠카를 선전할 때면 늘씬하게 빠진 여자가 등장하고 정작 자동차는 남성이 몬다(이 부분에서 모두가 늘 그렇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공유한 이미지를 소개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진/ 〈수정할까요 #19〉(염중호 작, 2003).

몸에 붙어 있는 자연스러운 속도 개념은 물신을 생산하는 주체에 따라 확연하게 다른 평가를 가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제 몸에 대한 주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따라서 내 몸의 속도는 내가 알아서 제어하거나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관장하는 사회적 잣대 위에서만 조절돼왔다. 몸을 재게 놀려 바지런한 사람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렇게 바지런한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내 일신이 편안하므로 참으로 좋다. 하지만 바지런한 몸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는가? 집에 가봐라. 모든 어머니들은 아버지들보다 평균적으로 부지런하다. 그런 어머니들 때문에 집안에서 엉켜 제자리 못 찾는 짐은 없다. 집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온갖 물건들을 집어들면서도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바지런한 어머니의 고단한 몸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바지런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제 몸이 간사해서 남은 빠르되 나는 느리게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속도가 가치를 부여받을 때, 그런 것이다.

몸이 가지지 못한 속도를 탐할 때 우리는 말을 길들이거나, 노동자의 손상되지 않고 원기왕성한 ‘작동하기 좋은 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빨라지는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노동의 몸은 분절된 속도 안에 잠기도록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럼으로 정신이 배제되고 반복에 익숙한 몸의 속도를 생산성이 높다고 상찬한다. 이 비인간화된 몸의 속도 개념은 이제 국가경제의 존폐를 결정하는 일정한 단위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몇백년 전의 근대 언저리에서 몸의 속도를 즐기도록 방치되어 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우리 사회에서는 몸의 속도를 즐기는 스포츠와 레포츠가 유행이다. 건강한 신체에 대한 관심이 첫 번째 이유겠지만 우리는 은연중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기계적 속도에 지쳐버렸기에 몸의 속도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는지 모른다. 정신이 지배하는 몸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내 몸’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몸의 한계상황에 이르는 운동을 통해 제 몸의 주인이 바로 자신임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빠르기와 느림, 균형잡힘

그러나 살아 있는 몸을 확인하게 하는 한계상황은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제 몸의 주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한 뛰어다니기가 속도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우리는 속도의 한계를 의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몸을 사용하게 되었다. 5km를 몇분 만에 주파했는지 따지는 일은 제 몸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일이 되었다. 1000m를 몇분 몇초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점수를 깎았던 옛날 체력장이 다시금 공포로 다가온다.

사람이 살면서 제 몸의 속도를 확실히 느끼게 되는 경우는 운동장에서 달리기 대회를 할 때뿐이다. 그것은 포상에 대한 목표의식과 결부되어 있어 속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경우다. 그러나 진정한 몸의 속도는 정신과 육체의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균형과 관계가 있다. 육체를 정신의 우위에 놓아 파생되는 물신숭배의 정황에서는 빠른 속도가 늘 가치가 있게 된다. 정신(이성)을 육체의 지배자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일 때 감성의 억압이라는 통제될 수 없는 한계에 노출되는 몸의 게으름을 우리는 제어할 방법이 없다. 느림조차 속도이긴 하나 이 경우 몸의 속도는 몸에 대한 ‘자기소유권’만을 주장하게 됨으로써 타자와의 만남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따라서 빠르기와 느림, 그 사이에 균형 잡힘이 삶 속의 속도다. 두어 시간에 몇km를 뚫어야 사는 것이 속도의 온전한 개념이 아니다. 만화 주인공 하니는 빨리 뛰어야만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 빨라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몸이 빨라야 할 이유가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다. 아니, 빨라야 돈을 좀더 받을 수 있다면 솔직하고도 구체적인 이유가 되겠다. 우리는 몸의 속도에조차 상품을 내건다. 그리고 우리는 몸이 상품으로 온전할 때만 속도에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하니’처럼 제 마음속 엄마를 찾아가는 속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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