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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거울 앞에서 타인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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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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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화려하게 치장한 외모로 잃어버린 자아 확인… 정녕 당신은 거울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가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너무 쉽게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기 좋아한다. 우리는 아기들을 보면서, 흔히 부모를 닮았다느니 친척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서로 간에 친밀감을 확인한다. 나이가 좀 들면서 우리는 상대에게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한다. 대체로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크게 역정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아주 유명하고 이른바 잘나가는 누구를 닮았다고 하면, 분명 생김새 가운데 어떤 부분만 그렇다는데도, 듣는 사람이 이 말을 외모에 대한 칭찬처럼 여기기까지 한다. 기분이 좋은 얼굴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우리는,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지만, 왜 제 얼굴이 누구를 닮았기를 은근하게 바라는 걸까 제 얼굴을 보면서도 말이다.

누군가를 닮은 당신, 자아는 어디로 갔나


사진/ <수정할까요#15> 염중호 작, 2003
사람이 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사실 오래되지 않은 습관이다. 물론 청동기 시대 유물로 청동거울이 있지만, 당시 거울이 근대적 자아를 반영하는 매개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에피소드처럼 자신을 발견한 인류의 소중한 기억은 아예 무시할 수 없지만, 이 또한 ‘나’를 찾아가는 더할 수 없이 어려운 과정으로 파악하기에는 과대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얼굴을 바라보며 자아를 찾으려는 막연한 희구에 몸떨었던 기억은 아무래도 추측하고 추론이 가능한 어떤 시점으로부터 가늠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미세한 관심은 서구 문화의 특징이므로 그들의 흔적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쉽다.

자화상, 자신의 얼굴을 자신이 직접 그리는 그림은 동양권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서양에서도 15세기 초, 르네상스기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한다. 이후 서구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근대의 설정이 정교해지는 노정에 맞춰 자화상은 서구 미술에서 다른 장르의 미술형식과 견줘도 무시 못할 질적·양적 수확을 거두게 된다. 자화상이라는 특별한 장르를 해석하면서 많은 이론들은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화가의 정신적 세계를 빠뜨리지 않고 지적한다. 사실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의 몫이 아니라 철학의 몫이다. 하지만 시대에 걸맞게 성숙해지는 사유체계가 예술 창작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자화상에서 자기 성찰 운운하는 것이 그리 어설퍼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 해석은 거울을 매개로 하여 아주 적절한 분석방식이 된다. 서구 근대의 정점이라고 할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나타난 많은 예술사조 안에서 화가들은 엄청난 양의 자화상을 남겨놓았다. 렘브란트나 고흐의 그것처럼 자기 성찰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자화상은 미술이 ‘현대’라는 시점으로 분류되는 곳에서부터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작품들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현대’라는 시공간에서 허락되지 않거나 그다지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은 아닐까 미술가들은 더 이상 자화상에 붙이는 의미-반성적 자아를 다른 곳에서 찾아냈거나 찾아내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타인과의 동일시 유발… 황당한 거울의 변신

사진/ <수정할까요#15> 염중호 작, 2003

거울은 의미가 풍부한 사물이다. 반영의 직설적 표현이거니와 성찰의 은유적 표현이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춰진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아낸다고 믿는다. 그런 거울을 사람들은 하루에 몇번이나 볼까 거울을 보면서 거울 안의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쳐다보고 있을까 쫓기듯 살고 있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슬쩍 고개를 들어 양치질하는 모습을 흘끗 보면서 내면을 바라볼 수나 있는 걸까 우리는 일상의 순간에 멈춰서 거울을 통해 잃어버린 자화상을 찾아내지 못한다. 바뀌어버린 시간개념 안에서 우리는 영영 자화상을 그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기꺼이 닮아 내 밖의 ‘나’를 흘끗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모른다. 기왕이면 유명 연예인이 좋다. 당연히 그(그녀)와 동일시되면서 ‘나’를 찾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거울은 동일시의 희열을 확인하고 증거물을 담아내는 그릇처럼 변해버렸다. 담아도 담기지 않기에 우리는 거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연민과 자기애 때문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지 못하므로 우리는 거울 앞에서 외모에만 치중하라고 자기를 설득하는 중이다. 이제 거울은 화려하게 치장된 내 외모를 잠깐 확인하게 해줄 뿐이다. 이제 거울은 사람한테는 관음에 유용한 사물일 뿐이다. 황당한 거울의 변신은, 러브호텔의 천정과 벽에 그처럼 커다랗게 걸려 있는 것 아닐까

지금 거울에는 수동적 나만 있을 뿐이다

사진/ <수정할까요#15> 염중호 작, 2003

거울은 지나치게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기 때문에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우리의 잃어버린 자아를 너무 직접적으로 비추기 때문에 거울은 이제 자신만만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거울을 예전처럼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을 대신하는 반영의 사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현대’의 ‘지금’은 우리가 왜 바쁜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고 그저 내몰기만 한다. 내몰리면서 우리는 자기가 투영되고, 자기가 고스란히 들어 앉아 있는 성찰의 거울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사물처럼 돼가는 것, 사물처럼 가치를 평가받는 것, 그래서 사물로 위장하고 포장하는 내가 나처럼 비춰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고는 ‘아, 나는 누구를 닮았어’ 한다. 당신이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칭찬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 나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잃어버리고 싶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안전한 거울이 되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니 곤혹스럽지도 않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만 보아도 되니 관음이 도발하지 않는 한 ‘나’는 늘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자화상은 타화상이 되었지만 그걸 붙들고 내면세계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한다. 이제 내 얼굴을 나는 모른다. 거울에 비춰진 나의 외모는 수동적인 나를 보여줄 뿐이다. 가짜 ‘나’를 나라고 믿기에는 주체로서 나에 대한 자신이 없다. 한번도 그렇게 ‘지금’ 내가 ‘여기에’ 서 있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제 맑은 얼굴로 거울을 볼 수 없다. 거울 앞에 서기 위해 우리는 기본적인 기초화장을 조금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차라리 누구를 닮은 ‘나’를 비로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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