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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델에 의한, 모델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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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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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가상세계를 지배하는 환각적 아이콘… 초라한 일상에 침투해 감각 마비시켜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하게 접하는 단어가 ‘모델’이다. 어떤 자동차 업체가 새 차를 발표할 때, 차의 모델은 어떻다고 설명하고, 가십난에 나올 뻔한 이야기 속에는 간혹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영화나 패션을 다루는 기사 안에서 모델은 무척 자연스러운 직업이면서 말 그대로 모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대화 중에 흔히 사용하는 ‘모델’이라는 말은 ‘본보기’를 말한다. 하지만 본보기라는 고유의 우리말을 대신해 사용되는 ‘모델’보다는 특정한 직업군을 통칭해 사용하는 경우가 더욱 일반적이다. 특히 패션모델을 압축해 부르는 ‘모델’은 우리말 속에서 일반명사처럼 사용된다. 우리는 특정 직업군을 일컫든, 상품의 메신저로서 지칭되든 모델들에게 포위당한 채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모델들은 이토록 우리 생활 속 깊숙이 간섭자로 등장하게 되었을까

생활의 간섭자로 물신 중독 이끌어


사진/ <수정할까요 #13> 염중호 작, 2003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모델의 몸과 웃음에 현혹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편적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하며, 모방의 진정한 ‘본보기’가 되는 아이러니를 생산하기까지 한다. 왜 그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강력한 메신저 역할을 하는가 이 새로운 직업군의 등장과 역할은 우리 세계의 어떤 변화를 외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가상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 ‘모델’들이다. 이 직업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역사가 오래됐지만,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침투해 위상을 드높인() 현상은 2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 모델이라는 직업이 다양한 사회적 범주 안에서 독립적이고 분명한 역할로 자리잡기까지 그 역할을 가수나 영화인 또는 텔레비전의 유명 탤런트들이 대신했다. 하지만 점차 모델의 정확한 용도()에 눈뜨기 시작한 전문적인 모델과, 모델로서 효용성이 있는 전문가들의 모델화는 하나의 추세를 이뤄냈다.

모델의 웃음과 몸짓은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처럼 사용돼 우리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영향력의 행사는 결국 모델의 생명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마련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모델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메신저로서 그들의 역할은 이미 ‘모델’로서 태어날 때부터 용도의 폐기시점이 정해져 있다. ‘모델’은 빨리 죽는다. 누군가가 그들의 생명고리를 빨리 끊어버린다. 순환되지 않는 직선 위의 질주자로서 ‘모델(들)’은 앞으로만 치달린다. 메시지가 강력할수록 모델의 생명은 짧아진다. 우리는 모델을 통해 환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지만 결국 본질은 환상이므로 환상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 때문에 그들의 생명력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상업주의 사고 안에서 순환되지 않는 모델의 역할과 단명하는 운명은 겉포장을 바꾼 채 상업적 목적을 지속시키려 할 때 매우 유용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모델들의 짧은 교체시기는 그들의 역할이 결국 ‘보여지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델의 비주얼한 부분은 똑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하면서도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부분만을 바꿔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상업주의 안에서 그들의 생명력은 짧을수록 메시지의 강렬함을 지속시킬 수 있다. 모델을 통해 환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간절한 상업주의 사고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델(들)이 쏟아내는 메시지들은 짧은 생명력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강렬한 문체로 구성된다. 극단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메시지들은 ‘행복’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 ‘기쁨’이란 모습으로 개인적인 삶 안에서 제각각 다른 차원을 구성하는 모든 가치판단 위로 단 하나의 유형만을 융단폭격하듯 떨어지게 마련이다. 마치 모델의 엷은 웃음이 우리의 행복인 것처럼 말이다.

모델의 엷은 웃음이 우리의 행복인가

사진/ <수정할까요 #13> 염중호 작, 2003
모델이라는 직업군의 급부상과 여러 직업군에서 발췌되는 성공모델 등장과 역할은 우리 사회 안에서 비중이 점점 커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를 외형적으로 암시하는 걸까 몇해 전 우리 사회는 경제적 난맥을 사회적 고통으로 여기며 모든 국민이 함께 그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내던져졌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시기에 우리 사회에 등장한 새로운 본보기가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재화를 또 다른 재화로 더 크게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이때 새로운 경제질서의 구축과 세계화라는 거대한 구호를 내세우며 급거 부상한 모델들은 대체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일한 화려한 경력이 있으며, 미국식 가치를 몸으로 실천하는 공통점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실생활에서도 그러하겠지만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더 직업적 모델처럼 꾸며져 소개되었다. 말쑥하고 점잖은 외모와 이른바 말하는 명품들로 치장된 생활 단면들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그리게 했다. 그들의 모델 역할을 얼마나 선망했으면 건강한 노동으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진짜 삶’은 자꾸만 유치해지고 대박의 꿈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무장했을까. 비슷한 시기에 스포츠 스타들의 성공모델 등장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속한 스포츠의 속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게 하기까지 한다. 우리 관심사는 스포츠를 스포츠답게 구성하는 내용보다 스타의 새로운 급료와 계약 조건에 집중돼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모델로 등장하는 스타 때문에 직업으로서의 모델(들) 또한 새로운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모델로서 전문성을 통해 단순하게 상품에 대한 메시지만을 전달해서는 곤란해졌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성공’을 상품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업주의 첨병으로 갈수록 몸집 비대화

이제 상품(물건)이 없어도 성공이라는 이미지만으로도 이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델이라는 직업이 각광받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마치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보여주어야 할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수더분한 인상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손톱과 발톱을 다듬으며 무심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광고콘티에 맞춰 모델은 우리 사회의 진짜 모습이 어떻든 가상세계의 진실성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수더분한 인상’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처럼 모델의 다양한 필요성은 실생활과 가상생활의 연결고리로 역할이 규정됨에 따라 더욱 커진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모델이라는 직업 안에서만 사실일 뿐이다. 우리에게 매체가 전달하는 세계는 절반 이상이 상업주의가 진행하는 선분상의 직진운동만으로 구성돼 있고, 그 운동 안에서 모델의 역할은 더 비대해진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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