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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건강은 숫자놀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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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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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특성 반영하지 못하는 신체 수치들… 건강의 신화에서 벗어나 몸에 생명력을

<수정할까요#11><염중호 작, 2003>.
“올 한해도 건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새해 벽두에 남에게 할 수 있는 덕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소원 가운데 하나가 부모님의 건강이에요”라는 어린아이의 말은 감동까지 전해준다. 우리는 내 몸과 네 몸 모두 건강하라고 기원하기를 즐긴다. ‘건강은 곧 행복’이라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캐치프레이즈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경고와 맞물려 삶의 태도에서 건강을 지키거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되었는지 우리에게 잘 알려준다.

이상적 신체라는 허구적 수치의 노예

<수정할까요#11><염중호 작, 2003>.

개개인이 건강한 몸을 가진다는 사실은 중요한 뜻이 있다. 생활에서 몸은, 대체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남에 대한 배려라든지 더 적극적으로 남을 보살펴줄 수 있는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 예컨대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명이 질병을 얻어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건강해야 그를 도울 수 있다. 또는 최소한 병들지 않은 신체를 가짐으로써 더 활력 있는 생활을 영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은 생명을 전제할 때뿐, 사실 우리 몸은 살면서 죽을 때까지 ‘어떤 유한한 상태’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 한다. 당연히 건강의 척도는 성별, 연령차, 직업, 각자 일하는 환경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정해질 수 없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얼떨결에 건강한 몸이 곧 이상적인 신체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력이 쇠진해진 몸을 가질 만한 나이의 노인이 건강하다고 보는 것은 그 세월이 변화시킨 몸을 염두에 두고 판단하는 것이다. 당연히 청년의 건강함은 몸이 ‘청년다움’을 전제할 때다. 여기서 우리는 청년의 몸을 일일이 수치로 환산하여 제시하는 무모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수정할까요#11><염중호 작, 2003>.


건강은 생명을 이야기할 때 필요한 수식어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생명은 죽음과 대비되는 듯하지만 태어나고 죽는 그 사이의 시간에 존재할 뿐이다. 그 사이 시간에 놓인 생명은 스스로 움직이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이 생명체의 특징적 움직임은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만하다.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의 생명력이 건강의 징표기 때문이다. 더 높이 뛰거나 더 오래 달리는 것이 건강을 상징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건강 자체는 아니다. 자기 스스로가 움직이려는 활력원을 제 몸 안에 가지고 있을 때, 그 움직임의 지속성을 가지려 할 때, 신체는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 조건은 넓은 뜻에서 건강의 지표가 된다. 따라서 계량화된 모든 신체의 조건은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특정한 직업- 의사 또는 의료인- 에서 기술적으로 인용되거나 판단하는 수치와 보편적 상식으로 활용되는 몸의 수치는 건강을 상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의 주인에게 건강을 일깨워주는 정확한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 건강을 확신하기 위해 우리 몸을 얼마나 많은 수치로 뒤덮어야 그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우리는 우리 몸의 외부로부터 검증되는 과학적 수리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건강’을 확인받을 수 있는가

내 몸의 건강을 스스로 증명하라

<수정할까요#11><염중호 작, 2003>.

건강한 상태의 몸은 먼저 ‘나’로부터 검증되어야 한다. 질병으로부터 생기는 고난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시적으로 건강을 수량화해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내 몸이 내 생명의 시간을 끌어갈 때 나는 건강하다. 내가 내 몸으로 남을 배려할 수 있을 때 나는 건강하다. ‘건강한 상태’의 몸은 생활의 몸이 된다. 그래서 내 몸이 남을 배려할 수 없을 때, 내 몸이 내 몸만을 위할 때, 몸으로 생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망상은 결코 몸과 관련돼 있지 않다. 일례로 보약과 보양식을 상시로 먹고 싶어하는 관습적 욕망을 들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양식에 대한 습관은 그 의미가 크거나 작거나 보편적으로 건강을 위해 취하는 일련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보양식의 습관이 건강과 무관한 것은 몸을 보양함으로써 몸의 결핍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생명의 결핍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건강에 대한 망상은 ‘건강한 신체가 가지는 활력 있는 생활의 보장’이라는 등식관계의 설정이다. 이 설정은 개인의 건강함을 통해 사회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경제논리가 지닌 계량화의 성공적 캐치프레이즈일 뿐이다. 활력 있는 몸은 생명이 가지는 자기운동을 지속시키는 동력이지 사회적 생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수정할까요#11><염중호 작, 2003>.

우리는 건강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은 동의를 전제로 ‘건강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껴안고 살고 있다. 우리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정보를 뒤집어쓴 채 살아간다. 때로 채식 중심의 식탁이 얼마나 건강을 지켜주는지 각종 수치로 범벅된 데이터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반성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해 나이와 상관없는 신체를 유지한 성공담()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왜소해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건강을 다짐하기도 한다. 몸의 건강을 위해 기를 단련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들은 건강한 몸의 상태를 위해 우리가 고려하거나 선택할 만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물밀듯 넘쳐나는 건강정보가 내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 지표만을 위한 생활의 틀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결국 내 몸의 건강은 일주일에 명상 몇회와 기 수련 참가의 성실성 그리고 식단에서 차지하는 채소류의 비율에 의해 거꾸로 증명될 테니 말이다. 우리는 건강 지표에 대한 강박관념을 살면서 스스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계량화된 수치로 몸을 이해하지 못해

지표로 확인하는 건강에 대한 정보는 때로 우리를 좌절시키는 데 강력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 들이대는 건강한 신체가 유지해야 할 불필요한 지표들이 그렇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난감한 건강의 계량된 수치가 그렇다. 성생활과 관련돼 우리가 가지는 건강 강박증은(예컨대 흡연이 발기부전의 원인이 된다는 것) 성생활을 단순한 신체 접촉의 어떤 상황만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렇다. 건강한 노인들의 생활방식에서 건강의 지표들은 결국 중산층 이상의 사회계급만을 겨냥하고 있을 뿐이어서, 빈곤을 멍에처럼 지고 있는 노인들의 건강을 이 잣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서 건강에 대한 지표는 우리 몸이 선택한 ‘생명의 지속성을 위한 원동력’에 적합한지만을 가려볼 때 유효할 뿐이다. 몸은 결코 계량화시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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