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력 상징하는 사회적 코드로 자리잡아… 아름다움에 홀리고 권력의 마력에 취한 몸을 구하라
“무엇을 깨끗이 한다”고 할 때 그 말 가운데 우리는 깨끗함을 하얀색(원래 색을 구별할 때 하얀색은 없다. 하지만 아무 색도 없고 명도가 가장 높은 상태를 우리는 흰색-하얀색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하얀색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 하얀색이다)으로 빗대어 표현하곤 한다. 이를 깨끗이 닦는 것도 ‘하얀 이’로 대체해 표현하고, 어린아이 얼굴을 깨끗이 닦아주고는 “아이고, 우리 아가 얼굴이 하얗네”라고 말한다.
계급·인종적 우월감 암시하는 색깔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얀색에 대한 선호도가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하얀색’은 “눈이나 밀가루처럼 깨끗함을 은유하는 흰색”이라고 하니 이미 하얀색은 깨끗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좋아하는 하얀색의 뜻은 깨끗함이 아니라 하얀색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 때문이다. 하얀색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은 우리 전통으로부터 맥락이 이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구로부터 유입된(물론 지금은 우리에게 정말 친숙하고 일상화돼 있어 굳이 서구의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문화코드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얀색이 여성의 순결을 뜻한다고 ‘알고 있는 것’이 가장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흰색 웨딩드레스로 순결을 암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부가 하얀 것을 아름다움의 기본조건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물론 최근 들어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건강하고 섹시하다고 하고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삼지만, 이는 분명 유행을 전제할 때만 그렇다. 우리 조상들도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아름다운 여성의 최고 조건으로 삼았다. 또한 폐병 환자처럼 보이도록 창백한 화장을 통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려 한 서구 낭만주의자들도 하얀 피부에 탐닉했다. 로코코 시대 화장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많은 여성들이 납독이 올라 화장 밑 피부가 시퍼렇게 변질될 정도로 제 얼굴 썩는 줄 모르고 하얀색 피부에 매달렸다. 피부가 ‘하얀 것’은 일종의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을 암시해왔다.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도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급을 은연중에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하얀색 피부에 대한 편견과 편견으로부터 덧붙여진 뜻은 백인종 중심의 식민지 경영을 통한 인종우월주의의 암시를 들 수 있다.
하얀색 피부 선호가 가지는 은유된 뜻은 문화적 코드를 이용한 권력의 지속, 그리고 권력의 확인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의 서열이 세습되고 그 서열이 계급이 된 시절부터 귀족(왕족까지)문화는 한 사회의 문화모델이 돼왔다. 그런데 이 모델의 원형은 지금도 여전하다. 현재 부유한 자들이 귀족문화를 흉내내고, 흉내낸 부자들의 문화행태를 일반인들이 모방하려는 중층적인 문화지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문화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그 안의 코드들은 점점 더 상징성을 강화하면서 의미의 생산과 확산 그리고 재생산의 숨쉴 틈 없는 원운동을 되풀이한다.
몸을 통해 문화권력의 안정화 꾀해
누구든지 자신이 속해 있다고 믿거나 속한 ‘문화권력’을 확신하는 경우 그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의미를 공유하는 장을 만들려고 하게 마련이다. 또는 이미 만들어진 ‘장’에 편입되기를 갈망한다. 이 문화코드를 공유하는 ‘장’은 소속된 사람들에게 서로 간 유사성을 확인시켜주고 스스로 유사성을 확보했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공유가 확인된 ‘장’은 다른 문화코드를 가진 ‘장’과 지속적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하며 적극적으로 간극을 넓히는 데 주력한다. 미백의 아름다움은 ‘장’과 ‘장’이 다른 두 문화코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미백효과를 깨끗함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하얀색 피부가 상징하는 숨겨진 문화권력의 장으로 편입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하얀색은 색이 아니어서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린다. 검정색도 색이 아니어서 모든 색들과 조화를 이룬다. 하얀색과 검정색 특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옷을 세련되게 차려입는 기초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사람들이 검정색 유의 옷을 많이 입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세탁의 용이성과 쉬 더러움을 타지 않는 색이어서 그럴 것이다. 반면 하얀색 옷은 잘 차려 맵시 내기가 어렵다. 또한 쉽게 더러워지는 단점 때문에 활동복으로 적당한 옷 색이 아니다. 하얀색 선호가 몸(피부)보다 옷에 잘 적용되지 않는 까닭은 딱히 색의 효용성 때문만은 아니다. 미백의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계급성은 몸에만 국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몸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지 않고 ‘나’에게만 소유된다. 이 교환되지 않으며 영원히 자신의 것이 돼버리는 미백의 계급성은 당연히 교환, 양도, 판매를 통해 내 것과 남의 것이 혼재할 수 있는 몸 밖의 모든 것과 뚜렷한 차이를 가지기 원한다. 하얀색 옷이나 하얀색 자동차는 미백의 아름다움에서 비껴나 있다. 여기서 신체-몸은 정신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코드로 읽히는 사회적 의미망에서 존재하는 몸이다. 가시적 표현수단으로서 몸은 하얀색을 완벽하게 의미로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얀 이는 건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를 하얗게 만들려고 한다. 누런색의 이, 사실 치과의들이 건강한 이로 여기는 ‘건강의 의미’는 제 몸임에도 제 몸 주인으로부터 거부된다. ‘이’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몸에서 발견되는 의미의 역전은 곧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안정화되는 전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이 ‘몸’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름다움보다 강렬한 권력에의 욕망
신체와 결합된 문화권력은 체화과정을 통해 강력한 사회 내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개인적으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면서 구축되는 체화된 문화권력은 다른 사람을 통해 성취될 수 없으며 대리원칙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곧 소유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확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몸에 관한 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소한 일 또는 징후조차 의미가 넓어지고 과장되며, 마지막에는 의미가 다시 몸을 규정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하얀색-미백의 아름다움은 그 의미가 몸을 규정하는 대표적 역전현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납독을 마다하지 않은 로코코 시대 여인들이나, 병자처럼 보여도 무방하다고 한 낭만주의 시대 여인들이 하얀 피부를 통해 가지려 한 문화권력은 아름답게 보이려는 욕망보다 강하고 컸다.
이섭 I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수정할까요#10><염중호 작, 2003>.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얀색에 대한 선호도가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하얀색’은 “눈이나 밀가루처럼 깨끗함을 은유하는 흰색”이라고 하니 이미 하얀색은 깨끗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좋아하는 하얀색의 뜻은 깨끗함이 아니라 하얀색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 때문이다. 하얀색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은 우리 전통으로부터 맥락이 이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구로부터 유입된(물론 지금은 우리에게 정말 친숙하고 일상화돼 있어 굳이 서구의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문화코드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얀색이 여성의 순결을 뜻한다고 ‘알고 있는 것’이 가장 대표적 경우라 하겠다. 흰색 웨딩드레스로 순결을 암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부가 하얀 것을 아름다움의 기본조건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물론 최근 들어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건강하고 섹시하다고 하고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삼지만, 이는 분명 유행을 전제할 때만 그렇다. 우리 조상들도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아름다운 여성의 최고 조건으로 삼았다. 또한 폐병 환자처럼 보이도록 창백한 화장을 통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려 한 서구 낭만주의자들도 하얀 피부에 탐닉했다. 로코코 시대 화장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많은 여성들이 납독이 올라 화장 밑 피부가 시퍼렇게 변질될 정도로 제 얼굴 썩는 줄 모르고 하얀색 피부에 매달렸다. 피부가 ‘하얀 것’은 일종의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을 암시해왔다.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도 자신의 몸을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급을 은연중에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하얀색 피부에 대한 편견과 편견으로부터 덧붙여진 뜻은 백인종 중심의 식민지 경영을 통한 인종우월주의의 암시를 들 수 있다.

<수정할까요#10><염중호 작, 2003>.

<수정할까요#10><염중호 작,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