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모
관습에 얽매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미적 재물… 감성적 사고 통한 아름다움 재인식 필요
우리의 몸에는 자연스럽게 털이 난다. 털이 난 신체 부위에 따라 우리는 체모의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머리털은 머리카락이라 하고, 코 밑 수염을 콧수염이라고 하듯, 성기 주변의 털을 음모라고 통칭한다. 체모는 또한 제각각의 털 이상의 뜻이 있어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상징성을 띤다. 항의의 수단으로 머리털-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삭발의식을 하거나 눈썹을 밀어버린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상대의 발을 긴 머리카락으로 닦아주는 행위가 있는가 하면 상대방에게 굴욕과 수치심을 주기 위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일도 있다.
남녀의 털은 왜 다른 대접을 받나
몸의 털은 또한 성적 징후가 되는데, 자신의 몸이 어린아이에서 청소년기로 바뀌는 경계에서 몸의 체모를 발견하는 놀라움이 그것이다. 겨드랑이와 성기 주위에 자라는 털은 곧 몸이 성장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성장이 완성 돼가는 징후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몸의 털은 성적 가치를 은유하는 징표기도 하다. 예컨대 적당한 턱수염의 흔적은 더 남성적인 매력을 내보이는 징표로 작용하고, 털 하나 없는 매끈한 다리는 여성적 매력을 더 강화한다.
신체의 털에 대한 편견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대머리에 대한 편견을 보자. 머리숱이 적은 남성이 정력이 세다는 황당한 세속의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실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사람의 고민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저해할 만큼 심각하다. 하지만 미국 프로농구 스타가 머리를 빡빡 밀고(머리숱이 자꾸 빠져서인지 운동을 하느라 땀이 많이 나 거치적거리는 것이 싫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뒤에는 동료 선수들도 그렇고 청소년들도 그 머리형을 유행으로 받아들여 편견은 그대로이나 대머리가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잡는 현상을 보여준다.
여성의 몸과 관계해 털에 대한 편견은 좀더 심각해보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다리에 난 털은 흉한 대상이 되고 겨드랑이 털은 제거 대상이 된다. 아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 여성들은 체모를 지우는 데 노력과 시간을 당연하게 쓰고 있다. 또한 신체 부위별로 털에 대한 인식이 여성에게는 완곡한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까다롭게 적용돼 미적 기준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남성의 털은 하나의 유행이 되지만, 여성의 털은 늘 제거 대상이 된다.
남녀 공히 다 자란 몸이 되면 성기 주위에 자연스럽게 털이 나는데 성기 주변의 음모는 체모 가운데 곧잘 첨예한 사회적 논란 대상이 된다. 사진에서 보듯 성기를 암시하면서 그 주변의 음모를 보여주는 것은 표현에 대한 검열 작동이 없지만, 음모의 직접 노출은 곧 포르노적 도발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체모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여러 가지다. 특정 신체 부의의 털을 가리켜 징그럽다든지 유쾌하지 않다든지 또는 탐스럽다든지 등등.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모두 몸의 털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음모를 직접 보여주는 표현은 음란한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모에 대한 인상은 다른 신체 부위의 털에 대한 인상처럼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음모의 직접 노출은 포르노적 도발
그렇다면 다리의 털이나 머리카락(머리카락이 음모와 같이 취급받는 문화권을 제외하면), 그리고 수염은 표현의 수위에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으면서 유독 성기 주위의 털만을 문제삼는 걸까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남성과 여성의 겨드랑이 털은 다른 차원에서 아름다움의 조건에 놓여 있다. 남성의 털은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한 채 아름다움의 조건 밖에 있으며, 여성의 털은 몸으로부터 지우는 행위를 통해 아름다움의 조건 안에 있게 된다. 하지만 피상적인 아름다움의 조건 안팎에서 우리는 어떤 인상을 가지지도 못한 채 관습적으로 성차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또한 관습적 태도 역시 언제부터인지 시원을 알지 못한 채 우리 스스로를 얽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관습을 털어내고 편견을 이긴다면 몸의 털은 더 이상 지우지 않아도 자연스러움 때문에 이미 아름다운 게 아닐까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려면 그 대상은 자연 그대로거나 우리가 자연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것 그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 이 말은 독일 철학자 칸트가 ‘미를 의식하는 조건’에 대해 쓴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본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뜻이 있다. 하지만 이 뜻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새빨간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우리는 ‘전시 가치’를 더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체모를 지우는 행위는 인체 본연의 모습, 자연스러운 인간 몸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며, 뜻을 새롭게 하는 행위다. 이것은 바라보는 즐거움과 바라본다는 의도적 행위의 안팎이 단 하나의 가치-전시가치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렇게 느끼게 해준 감성과 인상의 유동성 때문에 ‘아름다움’조차 변화무쌍할 것을 걱정한다. 따라서 바라보는 행동에서 우리는 이성적 질서 안에서 변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고 이 조건 안에서는 아름다움조차 늘 ‘같은 아름다움’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발상은 감성적 세계보다 이성적 세계가 더 순수하고, 이성적 질서 안에서 찾아내는 아름다움이 시공을 초월해 늘 ‘같음’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르게 한다. 이성적 질서 안에서 찾아내는 아름다움은 곧 진리와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이성 중심적 사고는 이상적인 인간의 몸을 조건지어 형상화했는데 이 이상적 몸은 곧 몸의 원형(이데아)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틀을 신의 모습으로부터 가져오려는 상상력을 이용하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음모는 인간적 모습일 뿐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서구미술의 수많은 조각품들과 그림에서 음모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까닭이며, 또한 검열의 잣대로 음모 표현을 차단하려는 이유기도 하다.
대상을 편하게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인간의 몸이 이성적 사고의 수단이 될 수는 있으면서도 동시에 감성적 사고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이 ‘자연스러운 것’과 충돌할 때 우리는 이제 몸으로부터 전해오는 감성적 사고를 빌려 무엇이 진짜 아름다운 것인지 재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기의 털을 표현하는 데서 표현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없음은 간간이 외골수 예술가들만의 행위에서만 찾아볼 일이 더 이상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고 조형하는 것은 근대 이후 궁극적으로 대상으로부터 친근성을 찾는 일이고, 대상을 바라보는 편안함을 구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체와 털의 관계는 표현 대상이 될 때 이 궁극성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사진/ <수정할까요 #9>(염중호 작, 2002)

사진/ <수정할까요 #9>(염중호 작, 2002)

사진/ <수정할까요 #9>(염중호 작,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