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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름진 배를 꼭꼭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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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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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과 탐식의 모호한 경계가 욕망 자극… 다이어트 물결에도 음식 탐닉 끊이지 않아

사진/ <수정할까요#8>(염중호 작, 2002)
우리는 가벼운 쾌적함에서 극단적인 관능에 이르기까지 감각적 쾌감을 기꺼이 즐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에게 쾌감의 실체는 경험으로 육체에 기록되고 기억된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경험한 쾌감은 기쁨의 감정과 닿아 있지만 육체는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중요하게 기억한다. 목마를 때 시원한 청량음료나 맥주 한잔은 쾌감을 선사하지만 육체의 기억은 기쁨으로까지 확산되지 않는다. 반면 갈증의 고통은 육체 곳곳에 각인돼 슬픔을 오래 기억하게 한다. 이처럼 몸은 음식을 섭취하는 행동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섭생의 부족함으로 인한 괴로움을 정확하게 나누어 기억할 뿐, 음식에 관한 가치를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인류 대다수가 과도한 음식을 소비하는 지금(물론 궁핍과 기아가 공존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음식에 대한 욕망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선호로 탐식의 거대한 원운동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식이 문화행위로 자리잡아

탐식의 원인을 찾는다면 궁색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을 가르고 나누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곧잘 즐거움이나 유용성, 아름다움 등과 같이 다양하고 독특한 제 각각의 가치를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수동적 태도인 ‘느낌’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에게 비춰 이로움과 해로움, 선과 악 등의 대립적 가치형태로 끌어올리려고 한다. 이 가치의 서열을 이해함으로써 적어도 분류의 척도가 자신과 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음식을 먹는 것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를 벗어난 지금, 미식이 하나의 문화행위로 이해되는 지금, 음식을 소비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당하게 됐다. 이런 서열화는 음식에 대한 태도에서 깊고 풍요로운 감정의 영역으로 이해돼 더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로까지 동일시되곤 한다. 재즈를 들으며 음식을 먹는다든지, 포도주의 복잡한 갈래를 이해하며 맛을 음미하려 한다든지 하는 ‘먹는 행위’의 유형화는 그런 가치의 표현방식이다. 음식을 대하는 새로운 당당한 태도는, 탐식의 형태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욕망이 어떤 변화된 모습으로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변화되지 않는 음식과 관련된 욕망은 정력보양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행동뿐이다. 정력에 관한 탐식에서 우리 사회는 육체를 주술적 수단으로까지 사용하도록 조장한다. 정력과 관련된 탐식의 욕망은 남성의 생물학적 열성인자를 슬픈 의식의 제단으로 인도하는 제의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뭇 남성들은 자신의 비루한 육체가(실제 결코 비루하기는커녕 비대하기까지 한) 정력을 보강하는 보양제 음식을 먹음으로써 왜소한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비약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탐식의 제의는 결국 남성적 세계를 강화하는데, 그 ‘꿈꾸는 변화’에 대한 맹종이 안전한 은신처이자 도피처인 ‘우월한 인자들이 모인 세계(마초의 세계)’로의 환상여행을 현실화시킨다고 확신하게 된다.

남성의 제의적 수단… 부자와 빈자의 차이

사진/ <수정할까요#8>(염중호 작, 2002)
대대로 병약한 몸을 보강하거나 병석에서 몸을 털고 일어설 때, 우리는 보양제로서 고단백 음식을 섭취하는 많은 방법을 알고 있다. 결국 보양제는 식물성 음식을 주로 섭취할 때 부족한 영양분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고기류를 통해 단백질 섭취를 높이고 기름을 먹음으로써 균형잡힌 영양소를 몸에 투입하는 과학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상의 모든 음식이 고단백질로 이뤄지고 지방 섭취가 몸의 건강을 위협하는 지금 우리의 식단을 두고도 지속적으로 정력보양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음식에 투영된 욕망을 탐닉하는 ‘짓’일 뿐이다. 그 ‘짓’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계급적 우월성을 드러내고픈 욕망과 결부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음식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경계로부터 생겨나는 ‘차이’는 처음에는 양적인 것에서 시작해 점차 질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없는 자들의 음식이 자꾸 식물성 위주로 변화돼가고 육류 소비는 사회적 특권계급과 일치하는 문화적 양상으로까지 확산됐다. 음식이 기름지다는 것은(동물성 음식에나 어울리는 이 표현은) 풍성하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부유하고 풍요로운 생활의 지표이자 그에 상응하는 미학적 이상이 기름진 것-아름다운 것-부유한 것을 뜻하고, 이런 음식으로 계급을 구별하자 이것은 영양학적으로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생물학적 입장과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날씬함’의 이데올로기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자 기름진 음식에 있는 계급화 현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새로운 탐식의 이상형이 필요해졌다. 음식의 과잉섭취에 대한 위험과 공포가 기근에 대한 공포를 대처하는 요즘, 일부 사회에서는 ‘다이어트’라는 말의 뜻이 날로 확장되고 생활규범으로 심화되기까지 한다. 사람마다 자신의 요구와 특질에 맞춰 짜는 영양체제와 생명체제를 가리키기 위해 고안한 그리스인들의 용어 ‘다이어트’는 이제 일상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음식의 절제 내지 거부를 뜻한다.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 부정의 함의를 지니게 됐다. 바야흐로 ‘가벼운 식사는 효율성의 표시이자 힘의 표시’가 된 것이다.

사진/ <수정할까요#8>(염중호 작, 2002)
그럼에도 음식에 대한 탐식 양상은 강도를 더하고 있다. 적게 먹으면서도 여전히 먹는 것에 대한 탐닉은 ‘있는 자’의 권력을 가늠케 하는 척도다. 음식이 풍성하다 못해 과도한 이 시대에 광고가 부추기고 매스미디어가 앞다퉈 소비를 촉진시키는 탐식 유형은 쾌락을 추종하는 욕망의 돌파구처럼 보인다. 물론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죄악과 연결지어 교육시켜온 종교의 오랜 억압을 빌미삼아 탐식이 가지는 해방구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영양과잉으로 인한 질병이 영양결핍으로 인한 질병을 앞지르는 요즈음 전례가 없는 공포로서 음식에 대한 탐욕은 절제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부산물이다.

미식의 식탁에서 폭식의 거리로

음식의 절제가 음식에 대한 거부로 욕망을 배출하고, 다 먹지 못할, 못 먹을 양을 버리는 오만이 부의 가늠자가 된 지금, 우리 사회의 음식에 대한 처절한 소비형태는 미식의 식탁을 박차고 폭식의 거리로 나가버린 우화를 만들었다. 만족을 모르는 거대한 식탐이 극단적 관능과 맞물려 기름진 배에 끊임없이 음식을 채워넣는 ‘짓’은 지치지 않는 욕망이 쏟아놓는 또 다른 우리의 자화상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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