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예쁘고 잘생긴 엉덩이를 숭배하는가…익명성에 갇힌 도시인들의 관음적 세계
쉽게 노출되지만 절대 드러나지 않는 빵빵한 엉덩이를 우리는 좋아한다. 아니 그 엉덩이를 그저 좋아하기보다는 그런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바라만 보기보다는 만져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사실이다. 어느 외국 광고는 이 찰나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예쁜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대고 마는 남성의 성적 환상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간혹 외국의 유명 여배우가 유난히 볼륨 있는 자신의 엉덩이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험을 들었다는 풍문을 접하곤 왠지 모를 흥분에 살떨림을 한 기억이 있다. 아마 나는 그때, 그만한 금액에 버금가는 ‘빵빵하고 동글넙대대한’ 그녀의 엉덩이를 가지고 싶은, 그칠 수 없는 독점적 성욕에 빠졌을 터다. 엉덩이는 어찌됐건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완벽한 징후이며 매료의 대상이다.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의 엉덩이나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의 엉덩이 모두가 그러하다. 뿐이랴, 남성의 눈에 비친 남성의 엉덩이 또한 그렇다.
엉덩이에도 유행이 있다?
우리는 대체로 이성 간의 잘 생긴 엉덩이에 대해 목말라 한다. 아무도 그 까닭을 뚜렷이 알지 못하지만 엉덩이는 어떤 신체 부위에 견줘봐도 성적 흥분을 도발시키는 대상이고 짐짓 성희를 가장 정확하게 연상시키는 육체의 강력한 한 부분이다. 따라서 남성의 엉덩이가 탄력 있게 모여 있는 형태거나 수박을 쪼개 한쪽씩 올려놓은 형국을 두고 남성적 힘으로 여기는 일은 펑퍼짐한 엉덩이를 끌고 다니는 40대 모든 남성들의 처진 어깨를 더욱 추레해 보이게 한다. 아이를 순풍순풍 두어셋 낳은 아줌마의 커지고 퍼져버린 엉덩이를 두고 더 이상 여성의 매력이 없다고 확신하는 몰상식은, 성희를 단순한 육체노동과 일치시켜 이해하려는 단순함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슴 한켠에서 아줌마가 더 이상 아줌마가 아닌 엉덩이와 40대가 40대를 잊은 엉덩이에 대한 집착을 떨궈내지 못한다.
엉덩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때론 그 도가 넘쳐흐른다. 우스운 일이지만 옷으로 가린 엉덩이를 보면서도 크기나 모양새를 두고 그 사람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고, 때론 여성의 엉덩이를 보고 순산의 가능성을 가늠하기도 한다. 인종적 한계와 조건 때문에 아래로 처진 엉덩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한반도 안에 사는 사람들도 다른 인종적 특징인 튀어나오고 들어올려진 엉덩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난센스를 유감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 틈에 끼어 보형재를 이용해 실제로 톡 튀어나오고 약간 들린 엉덩이를 만드는() 성형이 유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엉덩이의 어떤 생김새에 우리 모두가 목매달고 예쁘다 하며 침 흘리기 때문이다. 그 ‘예쁘고 잘 생긴’ 엉덩이는 ‘예쁘고 잘 생긴’ 얼굴과 같아서 이 또한 유행을 따르게 마련이다. 마릴린 먼로가 한창 뜰 때는 조금 크게 보이고 좌우로 잘 흔들리는 엉덩이가 그녀의 얼굴에 찍혀진 ‘애교점’처럼 선호되었다. 그녀가 조금씩 뇌리에서 자극을 멈추려 할 때부터 작고 위로 추켜올린 탄력적인 엉덩이의 모양새가 찬사 대상이 되었다. 남성의 몸이 아직 성적 대상으로 크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남성의 엉덩이는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하면 족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몸 하나로 살아야 하는 요즈음 탱탱한 남성의 엉덩이는 남성의 성적 매력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엉덩이가 더 잘 드러나고 속시원하게 모양새를 보여주는 패션을 좋아하는 까닭은 바야흐로 성적 매력이 한 개인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편견과 오해로 범벅돼 있다 해도 말이다. 몸에 꽉 끼는 청바지는 한때 청년의 상징인 동시에 외설적인 패션으로 여겼다. 몸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는 한때 성숙한 여성의 상징인 동시에 성적 도발을 야기하는 패션의 경향을 대변했다. 두 가지 옷은 모두 엉덩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가지 옷의 또 하나의 닮음새는 옷의 쓰임새야 어찌됐건 간에 유행의 중심에 섰을 때, 도시의 삶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청바지는 도심 속에 던져진 부랑하는 청년의 자화상 같은 역할을 했고, 화려한 도시생활의 이면에 있는 깊은 그늘처럼 드리운 드레스는 여성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도시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패션 경향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되는 도시 속의 육신을 은유하며 외설적인 외형을 보여주었다. 엉덩이에 꽂히는 ‘자유로운’ 눈길
도시 중심의 생활방식으로 재편돼가는 사회에서 육체는 익명성을 보장받는다. 익명성은 출생과 혈연이라는 관계를 떠나면서 철저하게 개인으로서 수많은 관계를 준비하지 않고도 만들 수 있으며, 그 관계만큼이나 많은 ‘남’을 만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익명성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나간다. 자신에 대한 이런 ‘새로운 눈뜸’의 경험은 개인적 필요와 개인적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의 육체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육체는 침실(내밀한 자신의 조건)이건 시장(쓰임새에 의해 거래되는 자신의 조건)이건 무작위적으로 놓인 조건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스스로 ‘여기에 있음’을 확인한다. 이때 육체가 스스로 요구하는 것은 쾌락이거나 고통이다. 그러나 ‘남’과 자신 사이의 긴장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데 실패하는 우리의 몸이 가지는 익명성은 가장 공격적 태도를 유지하며, 험난한 지점을 통과하고서야 겨우 숨을 몰아쉴 수 있다. 성적 대상으로서 우리가 엉덩이에 매료되는 것은 이 지점을 통과하는 나의 익명성을 보장받을 때다. 엉덩이는 언제든지 나를 향한 너의 눈과 대척점에 놓여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엉덩이를 어떤 성적 징후보다 즐겨 바라보는 것은 내가 네 엉덩이를 바라볼 때 그 엉덩이의 주인으로서 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편안한 관음의 세계가 신체 가운데 유일하게 엉덩이에 모여 있음을 우리는 기꺼이 즐기는 것이다. 비로소 독점적 성욕이 엉덩이를 만나 자유로운 눈길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만끽의 세계 때문에 우리는 엉덩이를 성적 상징으로 여기고 숭배하게 된다. 빵빵하고 살찐 엉덩이를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옷은 그래서 엉덩이와 함께 내게도 너에게도 그토록 매혹적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사진/ <욕망을 수정할까요?> (염중호 작, 2002)

엉덩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때론 그 도가 넘쳐흐른다. 우스운 일이지만 옷으로 가린 엉덩이를 보면서도 크기나 모양새를 두고 그 사람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고, 때론 여성의 엉덩이를 보고 순산의 가능성을 가늠하기도 한다. 인종적 한계와 조건 때문에 아래로 처진 엉덩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한반도 안에 사는 사람들도 다른 인종적 특징인 튀어나오고 들어올려진 엉덩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난센스를 유감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 틈에 끼어 보형재를 이용해 실제로 톡 튀어나오고 약간 들린 엉덩이를 만드는() 성형이 유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엉덩이의 어떤 생김새에 우리 모두가 목매달고 예쁘다 하며 침 흘리기 때문이다. 그 ‘예쁘고 잘 생긴’ 엉덩이는 ‘예쁘고 잘 생긴’ 얼굴과 같아서 이 또한 유행을 따르게 마련이다. 마릴린 먼로가 한창 뜰 때는 조금 크게 보이고 좌우로 잘 흔들리는 엉덩이가 그녀의 얼굴에 찍혀진 ‘애교점’처럼 선호되었다. 그녀가 조금씩 뇌리에서 자극을 멈추려 할 때부터 작고 위로 추켜올린 탄력적인 엉덩이의 모양새가 찬사 대상이 되었다. 남성의 몸이 아직 성적 대상으로 크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남성의 엉덩이는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하면 족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몸 하나로 살아야 하는 요즈음 탱탱한 남성의 엉덩이는 남성의 성적 매력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엉덩이가 더 잘 드러나고 속시원하게 모양새를 보여주는 패션을 좋아하는 까닭은 바야흐로 성적 매력이 한 개인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편견과 오해로 범벅돼 있다 해도 말이다. 몸에 꽉 끼는 청바지는 한때 청년의 상징인 동시에 외설적인 패션으로 여겼다. 몸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는 한때 성숙한 여성의 상징인 동시에 성적 도발을 야기하는 패션의 경향을 대변했다. 두 가지 옷은 모두 엉덩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가지 옷의 또 하나의 닮음새는 옷의 쓰임새야 어찌됐건 간에 유행의 중심에 섰을 때, 도시의 삶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청바지는 도심 속에 던져진 부랑하는 청년의 자화상 같은 역할을 했고, 화려한 도시생활의 이면에 있는 깊은 그늘처럼 드리운 드레스는 여성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도시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패션 경향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되는 도시 속의 육신을 은유하며 외설적인 외형을 보여주었다. 엉덩이에 꽂히는 ‘자유로운’ 눈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