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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화장 고치며 여성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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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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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남성의 욕망 자극하기 위한 오래된 미용술… 자연미 내뿜으며 여성 자신을 다듬는 도구로

사진/ 아머니와 딸. 자매는 외형적으로 닮았지만, 화장의 유무로 시각적 차이가 커진다.
수컷이 암컷을 꼬실 때, 가능한 많은 분비물로 야릇한 냄새를 낸다. 물론 모든 동물이 그러하지는 않지만 화려한 색채를 자랑한다거나 특유의 잘난 척하는 몸짓을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지는 않지만 일부 마초들은 제 잘난 맛에 한껏 몸매를 자랑하거나 그럴싸한 옷치장으로 여성을 유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좀더 적극적인 마초들은 그럴싸한 냄새가(일부 사람들은 이 냄새를 향기라 주장한다) 나는 화장품을 이용하여 수컷다움을 잘 드러내려 한다. 어떤 여성들은 얼굴을 뽀얗게 하고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도록 화장하여 여성성을 더 잘 드러내고 그럼으로 해서 남성을 유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화장은 내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을 전제로 자신을 치장하는 가장 뛰어난 인위적 기교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가능한 많이 바르고 예쁘게 보이기


화장은 물론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과 화장은 매우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화장품은 여성에게 곧 필수 생활용품이고 화장품의 브랜드는 그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잘 드러낸다고 굳게 믿는다. 화장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성에게 매우 심각한 생활의 지혜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한다. 화장은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학교에서 특강을 하면서까지 가르쳐주어야 할, 여성들의 여성화를 실현하는 덕목처럼 되어버렸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데 혈안이 된 현대 산업사회에서 화장의 기술은 보들레르의 <화장예찬>을 실천 강령으로 삼은 듯 보인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이성적이고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실천하기 위해 화장은 필요하다. 화장을 통해 비로소 여성의 아름다움은 고귀해진다”는 화장예찬론은 그 어떤 화장품 광고 카피보다 훌륭한 과장을 보여준다. 보들레르는 여성이 의복과 보석 그리고 장신구를 이용하여 외모를 변형시키고 얼굴과 손, 드러나는 앞가슴과 목덜미까지 치밀하게 장식하는 화장술로써 완성되는 여성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학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이 말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명품족들에게 큰 위안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화장에 대한 오해는 대상화된 여성성을 근간으로 하는 기본적인 남성중심의 사고에 기인하는 바 크다.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화장은 조금 다른 해석을 보이고 있다. 1879년에 출판된 롤라 몽테의 <여인의 미용술>에서는 화장을 통한 외모의 아름다움이 꼭 전문적 기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집에서 간단한 자기 관리를 통해 얻어지는 화장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또한 자연스러운 매력, 거동과 음성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조건지우는 중요한 요소임을 화장술과 함께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여성에게 화장이란 일차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지 자신의 바깥 세계를 위한 허무한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롤라 몽테는 일깨우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세 가지 흰 것, 세 가지 붉은 것, 세 가지 검은 것을 아름다운 여성의 신체조건으로 보았다. 옷 밖으로 드러나는 여성들의 신체 부위 중 피부와 치아 그리고 손은 하얄수록 아름답고 입술과 볼, 손톱은 묽을수록() 아름답다고 했다. 눈과 눈썹, 속눈썹은 검을수록 아름다운 조건에 들어맞았는데 이런 미적 취향은 결국 화장술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씩의 까다롭게 보이는 조건들은 사실 건강한 신체가 가지는 특징과도 일치한다.

미적·성적 본능에 충실한 적극적 행위

사진/ 화장품 코너의 포스터는 가장 아름답게 보여진, 꾸며진 얼굴로 만들어진다. 우린 이런 얼굴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오래된 화장은 육체 일부를 표면적으로 변형하는 인류 특유의 풍습 중 하나다. 물론 화장을 통해 드러나는 몸의 일부를 아름답게 보이려 하는 욕망이 이 오랜 풍습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화장은 미적으로나 성적으로 본능을 만족시키려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다. 또한 성별을 구분하고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간혹 이 화장의 범주에 반흔(피부에 일부러 상처를 내 그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나 도채(피부에 안료를 칠하기), 그리고 문신이나 피어싱까지 포함시켜 그 의미를 확장해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를 달리하며 발달해온 화장의 역사는 아무래도 여성중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규방총서에서는 화장품 제조법에 대한 기록이 있고 숙종 연간에는 화장품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판매하는 상인 ‘매분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성지가 탄생한 이후 여성전문지가 앞다투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정보 또한 화장술과 화장품에 대한 유행의 민감한 변화다. 그럼에도 화장의 역사 안에서 우리는 여성성이 화장을 통해 왜곡된 기록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화장을 통한 아름다움의 여러 조건들을 남성중심 사고에 복무하는 여성성에 한정해 생각하는 관습적 태도에 있을 것이다.

아주 더디고 느리게 변하지만 확실히 최근의 화장은(화장술과 함께 화장품의 선호까지) 여성의 사회적 위상 변화와 함께 여성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자연스러운 화장술의 선호가 그 징표라 할 수 있다. 문신의 타부를 이겨내는 유행과 젊은층의 피어싱 선호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체에 대한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치장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문신과 피어싱은 마치 제의행위에 의존하는 듯한 화장의 원초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몸의 주인으로서, 아름다움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가지는 지독히도 고독한 능동성의 다른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화장은 여성을 위해 필요하다

사진/ 신부는 결혼식의 주인공이고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 의무감은 이따금 과장된 화장의 얼굴로 나타난다.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목표가 된 여성의 아름다움은 환상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그 환상은 가장 활동적인 여성상을 이루는 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씩 화장술에서 보여지는 변화는 화장의 역사 안으로, 그 중심으로 여성을 안내하고 있다. 일찍이 종교가 모욕하고 남성의 욕망으로 치환되었던 쾌락과 죄악의 존재로서의 여성성이 화장을 통해 슬프게 장식돼왔다면, 검은색 립스틱을 칠한 입술은 그 색만큼이나 어두웠던 화장의 역사 안에서 여성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있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이제 남의 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것으로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화장은 이런 추세를 재빨리 감지하고 변화하고 있다. 피부관리용 화장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은 여성 그 자신을 위한 화장의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스스로 우아하고 조화로운 존재로서 여성은 비로소 자신을 위해 자신을 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화장은 이제 그 여성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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