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지는 몸에 의미 부여해 수치의 대상으로… 원죄 의식 벗어난 에로틱한 상상력의 요체
“순수하고 정결한 나체를 바라봄으로써 조야하고 관능적인 충동은 소멸된다”라는 나체주의자의 견해는 옳다. 단, 이 경우 그 견해가 옳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매우 세련된 교육에 쏟아부어야만 한다. “나체는 성을 초월한 것으로서 호기심과 상상력의 산물인 각종 에로틱한 생각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킨다”라는 나체문화 옹호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이 경우 그 주장이 옳기 위해 우리는 과감하게 상업주의에 찌든 성을 해방시키는 데 엄청난 사회적 투쟁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알몸을 알몸으로 보고 마는 떳떳한() 행위는 자본이 우리를 교육한 그 질서로부터 훌쩍 자유로워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대상화된 몸의 주인들
대체로 옷을 벗은 알몸보다 옷을 벗는 과정의 노출이 더 에로틱한 충동을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완전한 알몸을 보는 것보다 더러 이곳저곳이 가려진 몸을 보는 것이 성애적 충동을 일으킨다는 것 또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벗은 몸에 대한 편견은 사실 몸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몸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거래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아슬아슬하게 천이 걸쳐진 모델의 몸이 포르노적 대상이 되는 데는 그 천 조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완전한 알몸은 완상(천천히 감상하고 음미하려는 태도)의 대상으로 지나치게 도발적이다. 누구라도 천천히 음미하는 거친 과정을 옆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게다. 한편으로는 벗겨지는 과정에서 노출되는 몸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권력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권력의 냄새를 통해 대상화된 몸의 주인이 되고픈 욕망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당연히 알몸의 당당함은 몸의 주인공에게 있으므로 우리는 섣불리 그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누가 이 알몸에 거래를 틀 것인가.
거래되지 않는 알몸이 점차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자본이 엉겨붙는 ‘벗겨지는 몸’으로 몸의 가치는 커져간다. 살짝 벗겨지는 데도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지불하겠다는 미국표 성인잡지의 파격제안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가십을 통해 접한다. 이제 우리 대중문화에서도 가끔 자신의 예능인으로서 가치를 슬쩍 벗은 몸 위로 덮어씌우는 기술이 발달하고 있다. 그리곤 말한다. 이제 당당하게 자신의 성을 드러내며 정치공세를 펼치겠다고. 맞는 말이다. 적어도 당당한 몸의 주인으로서 성적 정체성과 함께 정치성은 키워진다. 하지만 알몸이어야 한다. 벗겨지는 과정의 몸을 가지고는 안 된다. 경멸과 배척의 올가미에 갇힌 알몸 이처럼 알몸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사람이 비단 우리들뿐만은 아니다. 아무렴 성경에서조차 신격의 인간이 욕망의 순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인격의 인간이 되는 순간,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잎새로 자신들의 음부를 가린 사실을 들어 알몸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원죄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던가. 알몸의 수치를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알몸이 가지는 건강함을 겨우 닫혀진 사적 생활영역에서만 자위하며 바라보게 되었다. 이 사적 생활영역의 안위성은 사실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난 심각한 소통의 폐쇄성임에도 오늘날 우리는 절대 안정감을 이 공간에서 찾고 있다.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해주는 사적 생활영역은 각자의 영역을 피차간에 침범하지 못하더라도 알몸에 대한 공통된 견해에 대해 열려 있음으로 인해 각자 알몸에 대한 내밀한 상상의 관계를 성사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 공간이 사적 생활영역을 빙자하며 이제 몸을 부려 갖은 성적 상상력을 부풀리게 하는 이발하지 않는 이발소와 마사지하지 않는 마사지실을 번성하게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우리는 잊고 있던 ‘알몸에 대한 당당함’을 수치의 수건과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알몸은 수치로 여기고 벗겨지는 몸은 앞다투어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벗겨지는 몸에 관대해진 우리가 가끔 안이한 사회적 기준으로 노출의 척도를 만들곤 한다. ‘여기까지’라는 경계에 걸쳐지는 몸은 그 경계를 넘어 숨쉬는 몸을 보여주려는 어떤 태도보다 정당하다. 우리는 성적 상상력으로 부풀려진 몸을 처단하려는 기발하고 단조로운 수많은 이론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논란 안에 늘 알몸에 대한 혐오증과 벗겨진 몸에 대한 예찬이 함께 있음 또한 쉽게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성적 상상력은 몸에 구현되지 못하고 몸을 거래하는 방식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몸 그 자체에 대해 당당함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퇴폐적인 성품의 사람’으로 간주하려는, ‘늘 성적 장애를 앓고 있는’ 잣대가 사용된다. 이 분별력 없는 척도는 사회성을 회복하여 당당함을 되찾아야 하는 알몸에 경멸과 배척의 누더기 옷을 걸치라고 한다. 오히려 상업주의 거래 원칙에 준하여 안녕한 ‘벗겨지는 몸’은 예술로까지 승화되어 완벽한 몸의 환영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아직 알몸이 되지 않았으므로 ‘퇴폐적인 성품의 사람’들이나 눈여겨볼 그런 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슬한 거래방식 위에 놓인 몸이 되레 알몸보고 상업주의를 표방한다고 의뭉을 떤다. 우리는 흔히 이 역설에 휘말려들어 벗겨지는 당당함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알몸은 가리개 뒤에서나 겨우 내 몸인 것이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게 하는 존재 이제 알몸에 대해 우리는 순수하고 정결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알몸을 보고 조야하고 관능적인 충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최소한 알몸은 그 주인의 몸으로 있으니 말이다. 또한 알몸은 성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지워야 한다. 알몸은 수많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인해 에로틱한 생각을 살찌우게 만드는 요체임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알몸은 정신과 늘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게 하는 존재로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당신의 알몸을 탐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벗겨지는 몸은 순수하고 정결해져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벗겨진 몸은 성을 초월하여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인해 에로틱한 생각 밖으로 빗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겨우 거래방식을 떠나 이제 옷을 벗어야 하는 알몸에 대한 예의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사진/ <수정할까요 #5> (염중호 작, 2002)
거래되지 않는 알몸이 점차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자본이 엉겨붙는 ‘벗겨지는 몸’으로 몸의 가치는 커져간다. 살짝 벗겨지는 데도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지불하겠다는 미국표 성인잡지의 파격제안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가십을 통해 접한다. 이제 우리 대중문화에서도 가끔 자신의 예능인으로서 가치를 슬쩍 벗은 몸 위로 덮어씌우는 기술이 발달하고 있다. 그리곤 말한다. 이제 당당하게 자신의 성을 드러내며 정치공세를 펼치겠다고. 맞는 말이다. 적어도 당당한 몸의 주인으로서 성적 정체성과 함께 정치성은 키워진다. 하지만 알몸이어야 한다. 벗겨지는 과정의 몸을 가지고는 안 된다. 경멸과 배척의 올가미에 갇힌 알몸 이처럼 알몸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사람이 비단 우리들뿐만은 아니다. 아무렴 성경에서조차 신격의 인간이 욕망의 순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인격의 인간이 되는 순간,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잎새로 자신들의 음부를 가린 사실을 들어 알몸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원죄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던가. 알몸의 수치를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알몸이 가지는 건강함을 겨우 닫혀진 사적 생활영역에서만 자위하며 바라보게 되었다. 이 사적 생활영역의 안위성은 사실 자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난 심각한 소통의 폐쇄성임에도 오늘날 우리는 절대 안정감을 이 공간에서 찾고 있다.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해주는 사적 생활영역은 각자의 영역을 피차간에 침범하지 못하더라도 알몸에 대한 공통된 견해에 대해 열려 있음으로 인해 각자 알몸에 대한 내밀한 상상의 관계를 성사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 공간이 사적 생활영역을 빙자하며 이제 몸을 부려 갖은 성적 상상력을 부풀리게 하는 이발하지 않는 이발소와 마사지하지 않는 마사지실을 번성하게 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우리는 잊고 있던 ‘알몸에 대한 당당함’을 수치의 수건과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알몸은 수치로 여기고 벗겨지는 몸은 앞다투어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벗겨지는 몸에 관대해진 우리가 가끔 안이한 사회적 기준으로 노출의 척도를 만들곤 한다. ‘여기까지’라는 경계에 걸쳐지는 몸은 그 경계를 넘어 숨쉬는 몸을 보여주려는 어떤 태도보다 정당하다. 우리는 성적 상상력으로 부풀려진 몸을 처단하려는 기발하고 단조로운 수많은 이론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논란 안에 늘 알몸에 대한 혐오증과 벗겨진 몸에 대한 예찬이 함께 있음 또한 쉽게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성적 상상력은 몸에 구현되지 못하고 몸을 거래하는 방식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몸 그 자체에 대해 당당함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퇴폐적인 성품의 사람’으로 간주하려는, ‘늘 성적 장애를 앓고 있는’ 잣대가 사용된다. 이 분별력 없는 척도는 사회성을 회복하여 당당함을 되찾아야 하는 알몸에 경멸과 배척의 누더기 옷을 걸치라고 한다. 오히려 상업주의 거래 원칙에 준하여 안녕한 ‘벗겨지는 몸’은 예술로까지 승화되어 완벽한 몸의 환영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아직 알몸이 되지 않았으므로 ‘퇴폐적인 성품의 사람’들이나 눈여겨볼 그런 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슬한 거래방식 위에 놓인 몸이 되레 알몸보고 상업주의를 표방한다고 의뭉을 떤다. 우리는 흔히 이 역설에 휘말려들어 벗겨지는 당당함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알몸은 가리개 뒤에서나 겨우 내 몸인 것이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게 하는 존재 이제 알몸에 대해 우리는 순수하고 정결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알몸을 보고 조야하고 관능적인 충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최소한 알몸은 그 주인의 몸으로 있으니 말이다. 또한 알몸은 성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지워야 한다. 알몸은 수많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인해 에로틱한 생각을 살찌우게 만드는 요체임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알몸은 정신과 늘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게 하는 존재로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당신의 알몸을 탐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벗겨지는 몸은 순수하고 정결해져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벗겨진 몸은 성을 초월하여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인해 에로틱한 생각 밖으로 빗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겨우 거래방식을 떠나 이제 옷을 벗어야 하는 알몸에 대한 예의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