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미끈한 다리가 그리 좋더냐

428
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성적 코드의 노예로 살고픈 각선미 타령… 몸의 주체로 편안한 다리를 가꿀 수 없나

사진/ <수정할까요 #4>(염중호 작, 2002)
아주 어렸을 때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들었던 것으로, 어떤 아가씨가 축구선수 차범근씨의 근육질 다리를 보면 왠지 흥분이 된다고 하는 각선미에 대한 일견을 듣고는 화들짝 놀란 기억이 난다. 아니, 왜 근육질 축구선수의 다리에 흥분하나. 그리고 그 흥분의 정체는? 도무지 어린 나이에 또한 흥분의 잣대에 매우 과문한 나이인 탓에 나는 아직도 그 짤막한 멘트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리에 집착하는 흥분을 알게 된 뒤 각선미에 대한 성적 상상력을 내 몸 깊숙이 잘 간직하게 되었다. 아니, 습관이 몸에 배었다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몸을 배반하는 어설픈 미의 기준

또 하나의 어린 기억에서 나는 쉽사리 각선미에 대한 집단 흥분을 떠올리곤 한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꽤나 유명짜한 외화로,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군의 한낱 소대 이야기로 풀어낸 프로였는데, 전쟁에 투입된 종군 여기자가 무릎 아래까지 긴 치마를 입었음에도 살짝 드러난 종아리를 보고 모든 소대원들(미국 군인들)이 환호성을 지른 장면이 그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왜 군인들이 그까짓 여자 종아리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미니스커트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라 나에게 이 구태의연한 태도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쁜 다리는 예쁜 몸과 같이 제각각 취향의 문제임에도 굳이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기꺼이 좋고 나쁨-최소한 견줘서 평가할 만한 잣대를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미끈하다느니 잘 빠졌다느니 하면서 길고 가는 다리를 좋아한다. 마치 물 좋은 생선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집단 미감의 호불호는 상대적으로 소외의 경계를 만들게 마련인데 당연히 굵고 짜리몽땅한 다리는 다리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다리는 그저 오래 걷거나 오르내리거나 오래 앉아 있을 법한 미덕만 가지면 그만이다. 그러니 생활 속에서 제 몫을 잘 버텨내는 다리는 인구에 회자되는 법이 없다. 우리는 우리 몸이 날마다 벌어지는 지루한 일상에 잘 적응할 때 쉽게 그 몸을 배반하고 마는 나쁜 습관을 같이 가지고 있다.

누군가 미끈한 다리를 예쁘다고 한다거나 그런 다리가 성적 코드로서 역할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이 선택의 기준에 어떤 가치 판단의 태도가 있는지 모두 모여 확인해보자고 제안한다면? 그러면 짐짓 점잖은 태도로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응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객관적 가치를 모두가 공유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고, 더구나 젊은 사람들은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에 반발하는 경향을 보여왔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성적 상상력만큼은 대물림해 각선미의 선호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환호하는 각선미 기준은 언제부터 이토록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미의 기준으로 작동하게 됐을까?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아니 우리는 우리가 지난 여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근대적 여성(모던걸)을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굳이 감추고 있는지 모른다. 규방교육보다 모던한 신교육을 받아들이는 여성, 고운 한복보다 활기찬 서양풍의 의습이 새로운 여성을 상징하면서 서양여성의 몸 기준이 어느덧 우리의 뇌리에 똑바른 아름다움으로 자리매김해 자칫 위험한 잣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방기한 것이다. 당연히 점점 과욕이 생겨 미스 아메리카처럼 최소한 몸의 비례와 길이의 정도가 그를 따르기 간절히 바라는지 모른다. 그리고 상상한다. 아, 나는 서양여자와 섹스하고 싶다. 그 간절함이 각선미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낳게 한 것이다.

서양의 기준 내세운 위험한 잣대

다리에 힘을 주어 굳이 무다리를 만들어보여야 웃음보를 터뜨리는 얄미운 관중 앞에서 어느 개그 우먼은 문맥과 관계 없이 치마를 살짝 들춰 제 다리를 보여주고 만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장대소의 관객석은 제 옆의 제각각 여자친구와 애인의 다리를 쉽게 잊어버리곤, 그 힘차고 역동적이기까지 한 용감한 다리에 실소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아! 우리는 각선미의 노예가 되었다.

다리를 다리로 보이지 않게 하는 절묘한 패션 중에 청바지의 힘은 대단하다. 언제는 꽉 끼어 다리를 휘어보이게 하더니 언제는 헐렁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하면서도 줄기차게 청바지의 그 상상력 속에 젊음을 녹여내고 다리를 녹여내어 드러나거나 감추는 경계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청바지 속의 다리는 각선미의 상상력을 배가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차용하고 있다. 맞다, 각선미는 젊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각선미를 보고자 애를 태우는 사람은 없다. 할아버지의 근육을 보면서 짧은 흥분을 내켜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다리를 감추는 것은 내가 젊지 못함을 용서하라는 뜻인 게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 미덕을 제각각 알아서들 잘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 각선미의 성적 흥분 코드가 유효하면 이제 우리는 할머니의 각선미를 당당하게 요구하자.

길을 지나다 우연히 보는 언니들의 각선미를 나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대한다. 아니, 그렇게 하려 노력한다. 휘어서 영문자 오형의 다리를 한 나로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니, 사람의 다리가 저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상상력이 발동되거나 성적으로 흥분되거나 하는 생리적 현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각선미에 대한 집착과 도착은 결국 상거래의 아름다운 원칙을 지키려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으로부터 오는 결과일 뿐이다. 광고에서 쉽게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들은 결국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으로서의 다리가 아니라 살아가는 중에 생기는 그 많은 여유시간에 필요한 여가용 몸의 일부로서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꾸고 만들어서 모셔야 하는 몸은 내가 쓰기에 편한 몸이 아니라 누가 봐주어야만 존재가 느껴지는 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다가도 화들짝 놀라 눈을 돌리게 하는 그런 다리가 되어버린다. 아! 나의 감사한 마음을 늘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각선미는 아름다운 몸이 아니다

튼튼한 다리는 애써 각선미를 돌려세우는 수식어가 되어버렸다. 울퉁불퉁한 다리는 덮어두어야 하는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한다면 까짓것 할 텐데, 그 다홍치마로도 다 가리지 못하는 다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아름다움과 거리를 두고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계급만 상상하게 하니 이제 각선미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더 옳지 않겠나 싶다. 나도 계급상의 점프만 한다면(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 각선미를 내 몸처럼 아름다운 몸으로 보게 될 것이다. 아니, 보고 싶다. 그렇게.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