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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공신체를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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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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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를 향한 몸부림… 내면 채우지 못하는 합성과 성형의 완성

사진/ <수정할까요 #2> (염중호 작, 2002)
흔히들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라고 말한다. 말만 할 뿐이랴, 그런 외모를 가지려 하고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할 뿐이랴, 외모가 출중하면 머리도 똑똑할 거라고 믿어버린다. 흔히들 그렇다. 그래서 이 나라의 무수한 청춘 남녀들은 제 얼굴을 뜯어고치려고 이렇게 저렇게 요모조모를 뜯어다 덧붙이고 깎아내 누굴 닮아가려 안달이다. 취직을 앞둔 사람들은 이 강박으로부터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얼굴을 조금은 덜어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미인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말은 곧 ‘순수’라는 어처구니없는 가치로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아! 모두들 이 한반도 안에서, 뚝 잘라 반토막밖에 안 되는 곳에서 저 희랍의 아프로디테(여자)가 되고 아도니스(남자)가 되려 한다.

반짝이는 순간에 취하고 싶어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신이며 사랑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그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바다에 녹아들어 거품이 생기고 그 거품으로부터 성형되었다. 신화는 늘 가르침을 주는데, 바로 아름다움이란 물거품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가르침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온 인류가 거부한 진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이야말로 영원하다고 믿고 (싶고) 그 어떤 것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확신한다. 물론 아름다움의 불멸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큰 가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지하기보다는 외모의 반짝이는 순간에 더 취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치는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절명의 기로에 놓여 있지는 않다. 다만 ‘내면’이라는 정확히 알 수도 없거니와 설명하기도 곤란한, 그래서 좀더 심연에 닿아 있을 것 같은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유재원 교수가 지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보면 “원래 아프로디테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힘을 가진 여신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생식력을 나타내는 여신으로 자연의 왕성한 생식력과 끈질긴 회생력을 상징하며 다산과 모든 생명체의 정상적인 성장을 주관했다. 그리스인의 도래와 함께 제우스 신앙이 들어오자 주신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잊혀지고 생식과 번식의 요체가 되는 사랑을 주관하는 일만이 그녀의 직분으로 남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미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이 기구한 여성사의 단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제각각 다른 외모와 내면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것- 삼라만상을 주관하던 절대적 신격이, 그러니까 실력 있고 내면의 탄탄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거기다가 외모가 아름답기까지 한 아프로디테(=여자)는 그냥 놔둘 수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그녀는 그녀의 탄생신화에서조차 외모의 아름다움이 물거품처럼 한순간임을 깨우치게 하는 명석함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신은 단순하게 사랑놀음이나 간섭하고 외모에나 신경쓰는 여자처럼 되어버려야 했고, 여자라는 이유로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가 외모에 집중되는 데 만족(?)하도록 교육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예쁘장한 눈매를 위해 수술대 위에 쉽게 올라가버리는 지금의 ‘아름다움’의 가치는 어쩌면 아프로디테를 욕보이게 하는 행위일 수 있다.

“얼굴이 예뻐야 에로스가 머문다”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엄청난 양의 그림과 조각품에서 늘 아프로디테로 은유된 아름다움은, 정확하게 말해 여자의 벌거벗은 몸은 늘 비현실적인 가치로 나타나 수많은 여성들의 몸을 괴롭히는 결정적인 야만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이 기이한 기준이 갑자기 한반도를 급습하면서 더구나 체형이 말도 안 되게 다른 우리의 ‘언니’들에게 더 큰 절망을 전제하면서 기꺼이 합성하고 성형되기를 부추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자신이 조금만, 아주 적은 견적으로도 쉽게 아프로디테로 대변되는 그 외모만은 가질 수 있다고 믿게 된 걸까?

성형과 합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신념은 남성에게 오랜 시간 동안 무효한 것이었다. 잘생긴 아도니스는 잘생긴 것말고는 큰 자랑거리가 없는 놈인데도 죽음과 부활을 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후세의 예술가들로부터 특별한 관리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저 잘생겼다더라 하는 풍문만 가지고도 멀쩡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주장하고 주관하는 것은 항상 남성 또는 남성적 이미지로부터였다.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후일 사랑의 전령이었던 에로스는 자기가 먼저 꼬신 아름다운 프시케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믿음 없는 곳에 에로스는 머물 수 없다.” 정말 웃기는 말이다.

세상이 변한 지금 “예쁜 얼굴 없는 곳에 에로스는 머물 줄 모른다”는 말이 오히려 정직한 말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믿음은, 그러니까 내면의 세계로부터 울리는 가치는 성형되거나 합성되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예 견적이 나오지 않으니 시도조차 하기 힘들지 모른다. 죽음과 부활을 주관하는 일은 신계의 일이다. 당연히 외모만 가지고는 바라보기조차 민망한 턱없는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그저 여기 조금 저기 약간 고치고 깎아보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모두가 절대미를 가져야 하는가

사실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다. 남보다 잘난 얼굴을 가지거나 말쑥한 몸매를 가졌다는 것은 드러내고 자랑할 일이다. 더욱이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라면 더욱 외모에 치중하고 매달릴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금 고쳐서 더 나아진다면 마치 조금 더 공부해서 하나라도 더 알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성형이나 합성은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란 말이 나쁠 것은 없지만 그 아슬한 경계가 있음으로 주의를 요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아름다움을 지향하려는 성형과 합성은 자칫 자신의 몸이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몸을 못살게 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꼭 예쁘고 잘나면서도 속이 꽉 찰 필요는 없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꼭 외모보다 한수 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꼭 아프로디테가 되어야 하고 아도니스가 될 필요는 없다. 제 자신이 너무 예뻐 기꺼이 수선화가 되고 만 나르키소스도 있지 않은가.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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